[연재] × 만들었는데 안 쓰게 된 것들
잘 만든 도구가 22일째 멈춰 있습니다
이걸 먼저 보여드릴게요.

종목 분석 리포트입니다. 반도체 네 종목을 넣었더니 현재가·추세·RSI·PER·ROE·변동성을 나란히 뽑고, 각 숫자가 무슨 뜻인지 해석과 판단까지 붙여 내놓았어요. 아래로 더 내리면 종목별 상세와 전망 밴드 차트도 있습니다.
솔직히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증권사 리포트 읽으면서 답답했던 걸 그대로 채운 물건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마지막으로 돌아간 게 7월 2일입니다. 오늘까지 22일째 안 열었어요.

만들어진 리포트를 날짜순으로 늘어놓으면 이렇습니다. 만든 날 하나, 다음 날 셋, 일주일 뒤에 하나. 그리고 끝.
오늘은 이 얘기를 해보려고 해요. 잘 만든 것 얘기 말고, 만들어놓고 안 쓰게 된 것들 얘기요. 이게 잘 된 것보다 배울 게 많더라고요.
또 하나는 2주 넘게 꺼져 있습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초단타 매매 시뮬레이터예요. 가짜 돈으로 비트코인·이더리움을 실시간 시세에 맞춰 사고파는 물건입니다. 진짜 돈은 안 들어가고, 만약 이렇게 매매했으면 어땠을지를 보는 거죠.
만드는 게 재미있었어요. 시세를 실시간으로 받아오고, 매수·매도 판단을 나눠 맡기고, 성과를 정리해서 보여주고. 커밋이 20개니까 반나절은 붙어 있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켠 게 7월 8일입니다.

폴더를 열어보면 .venv라는 게 남아 있어요. 이 프로그램을 돌리려고 깔아둔 부품 창고 같은 건데요. 켜둔 채로 그대로 멈춰 있는 상태입니다.
안 쓰는 이유가 "별로여서"가 아니었어요
처음엔 제가 만들다 만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둘 다 멀쩡히 돌아가요. 지금 켜면 지금도 됩니다.
그럼 왜 안 열까. 여는 방법을 나란히 적어보니 답이 나오더라고요.

종목 분석기를 한 번 쓰려면 다섯 단계를 밟아야 합니다. 폴더로 들어가서, 가상환경을 켜고, 서버를 띄우고, 브라우저로 접속하고, 다 쓰면 서버를 끄고요.
계산기를 쓰려면 주소창에 주소를 칩니다. 그게 끝이에요.
"다섯 단계래봐야 1~2분이면 되잖아" 싶으시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2분이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문제는 "지금 이걸 켜야 하나"를 한 번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궁금한 게 생겼을 때 그 사이에 마음이 식어요. 어차피 네이버 증권 켜면 대충은 보이니까요. 그렇게 한 번 안 켜면 다음엔 더 안 켜집니다.
그리고 이게 1~2분이 아니라 매번 1~2분이라는 게 핵심입니다. 궁금한 게 한 달에 스무 번 생긴다면 스무 번 다 그 다섯 단계를 밟아야 해요. 반면 네이버 증권은 앱 아이콘 한 번이면 열리고요. 정확도로는 제 도구가 나은데, 손이 가는 쪽은 정해져 있더라고요.
여는 방법으로 갈라보니 정확히 나뉘었어요
만든 걸 전부 늘어놓고 "어떻게 여는가"로만 갈라봤습니다.
여기서 좀 서늘했던 게, 갈린 기준이 "얼마나 잘 만들었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들인 공을 커밋 수로 세어봤어요. 멈춘 둘이 각각 23개, 20개입니다. 매일 쓰는 계산기는 31개인데, 그중 절반 이상이 만들고 나서 고친 것들이에요. 처음 만들 때만 보면 오히려 제일 적게 들인 축입니다. 파일 두 장짜리니까요.
종목 분석기는 지표를 여러 개 계산하고 해석까지 붙입니다. 시뮬레이터는 실시간 시세를 받아오고요. 공들인 쪽이 멈추고 단순한 쪽이 살았습니다. 이유는 하나, 여는 문턱이었어요.

이렇게 갈라놓고 보면 깨끗하게 나뉩니다. 주소만 치면 열리는 것들은 살아남았고, 켜야 열리는 것들은 전부 멈췄어요.

지금 살아 있는 도구 다섯 개입니다. 전부 주소가 있어요. 폰에서도 열리고, 남한테 링크로 보낼 수도 있고, 켜고 끌 것도 없습니다.

카드 지갑 같은 건 마트 계산대 앞에서 폰으로 엽니다. "어느 카드로 긁지?"가 궁금한 그 순간에 3초 만에 열려야 쓸모가 있어요. 그때 "가상환경을 켜고…"였으면 그냥 아무 카드나 냈겠죠.
그런데 하나는 억울합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 "그럼 켜는 건 다 실패네" 싶으실 텐데, 하나는 좀 다릅니다.

5편에서 다룬 사진 정리 봇이에요. 이것도 켜야 돌아가는 물건이고, 마지막으로 돌린 게 7월 12일입니다. 기준대로면 이것도 "안 쓰는 것"이죠.
그런데 이건 안 쓰는 게 아니라 다 쓴 겁니다.
사진 2만 6천 장을 정리하는 일은 한 번 하면 끝나는 일이잖아요. 다시 돌릴 일은 사진이 또 몇 천 장 쌓였을 때고, 그건 1년쯤 뒤일 거예요. 매일 안 여는 게 정상입니다.
그래서 "안 쓰게 된 것"을 셀 때 이걸 구분해야 하더라고요.
| 다시 쓸 일이 | |
|---|---|
| 한 번에 끝나는 일 | 가끔 온다 — 사진 정리, 글 옮기기 |
| 계속 궁금한 것 | 매일 온다 — 카드 혜택, 급여 계산, 지분 |
계속 궁금한 것을 켜야 열리게 만들면 죽습니다. 반대로 한 번에 끝나는 일을 주소로 만드는 건 별 의미가 없고요. 사진 2만 6천 장을 브라우저로 올릴 수도 없잖아요.
멈춘 둘은 계속 궁금한 것이었는데 켜야 열리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잘못 짝지어진 부분이었어요.
만든 이유였던 기능은 한 번도 안 돌았습니다
기록을 다시 보다가 제일 뜨끔한 걸 발견했어요.
이 도구의 핵심은 여러 역할을 나눠 맡아 분석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기술 담당, 재무 담당, 뉴스 담당, 거시 담당, 리스크 담당을 따로 두고 각자 본 걸 모아 판단을 내리는 구조요. 그게 이걸 만든 이유였어요. 혼자 다 보는 것보다 나눠 보면 놓치는 게 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만든 다음 날 나온 리포트 맨 위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원래의 멀티에이전트 호출은 API 키 미설정으로 미사용
→ 동일 분석을 그 자리에서 대체 수행
무슨 말이냐면, 그 나눠 맡는 부분을 돌리려면 유료 계정 열쇠를 하나 등록해야 하는데 제가 그걸 안 해뒀던 거예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냥 직접 분석해서 채웠습니다.
만든 다음 날부터, 만든 이유였던 그 기능이 한 번도 안 돌았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한 건 그래도 리포트가 잘 나왔다는 거예요. 숫자를 모아 오는 부분은 도구가 하고, 판단은 그 자리에서 물어보면 되니까요. 불편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쇠를 끝까지 등록 안 했고, 22일 뒤에 이 글을 쓰면서야 알아챘습니다.
지금 보면 이게 신호였어요. 핵심 기능을 안 켜도 아쉽지 않다면, 그건 그 기능이 필요 없었다는 뜻입니다. 나눠 맡기는 구조가 정말 필요했으면 열쇠부터 등록했겠죠.
이게 두 번째 교훈입니다. 도구는 어느 날 갑자기 안 쓰게 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반쯤만 쓰이다가 조용히 멈추더라고요.
만들 때는 왜 몰랐을까
지금 와서 보면 뻔한데, 만들 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왜 그랬는지 생각해보니 둘 다 이유가 있더라고요.
첫째, 만드는 동안에는 문턱이 없습니다. 개발하는 중에는 어차피 그 폴더에 들어가 있고 서버도 이미 떠 있어요. 다섯 단계가 이미 다 밟혀 있는 상태인 거죠. 그래서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물건을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쓰는 사람입니다. 그 상태로는 문턱이 안 보여요.
둘째, "일단 되게 만들자"가 기본값이었습니다. 종목 분석기를 만들 때 저는 "이게 되나?"가 궁금했지 "이걸 3주 뒤에도 열까?"는 안 물어봤어요. 되는 걸 확인한 순간 이미 궁금증이 풀려버린 거죠.
솔직히 말하면 만든 것 자체가 목적이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뭔가 되는 걸 보는 게 재미있었으니까요.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닌데, 그렇게 만든 건 그 재미가 끝나는 순간 같이 끝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물어봅니다
이 경험 뒤로 새 도구를 시작할 때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이걸 3주 뒤에도 열까? 연다면 어떻게 열지?"
답이 "폴더 들어가서 서버 켜고"면 그건 만들기 전에 다시 생각합니다. 둘 중 하나예요.
- 계속 볼 것이면 — 처음부터 주소가 있게 만든다. 서버 없이 열리게, 폰에서도 열리게
- 한 번에 끝날 일이면 — 켜야 하는 채로 둔다. 대신 다시 켰을 때 어제 하던 게 남아 있게 만든다
질문 하나가 더 붙었습니다. "이거 안 만들고도 되는 거 아닌가?"
종목 분석기가 딱 그 경우였어요. 지표 몇 개 뽑고 해석을 붙이는 일은, 사실 그때그때 물어봐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도구로 만들어야 하는 건 매번 똑같은 절차를 반복해야 하는 일이더라고요. 카드 1,180장 중에 어느 게 유리한지 같은 거요. 그건 매번 손으로 따질 수가 없으니까요.
반대로 한 번씩 다르게 물어보게 되는 일은 도구로 굳히면 오히려 불편해집니다. 물어볼 때마다 궁금한 게 조금씩 다른데, 도구는 정해진 것만 내놓거든요.
두 번째가 은근히 중요하더라고요. 사진 정리 봇은 1년 뒤에 다시 켤 텐데, 그때 제가 사용법을 기억할 리가 없거든요. 그래서 그건 다시 돌려도 이미 정리한 건 건너뛰게 만들어뒀습니다. 1년 뒤의 저를 위한 장치였어요.
그럼 주소를 붙여서 살리면 되지 않나
당연히 저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문턱이 문제라면 문턱을 없애면 되잖아요. 4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파일로 만들어 올리면 주소가 생기니까요.
그런데 둘 다 안 되더라고요.
종목 분석기는 시세를 실시간으로 받아오고, 판단을 만들 때 AI를 부릅니다. AI를 부르려면 열쇠(요금이 붙는 계정 키)가 필요한데, 파일로 만들어 올리면 그 열쇠가 페이지 안에 그대로 실립니다. 누구나 열어볼 수 있어요. 제 계정으로 남이 마음껏 쓰게 되는 겁니다.
시뮬레이터는 더 명확합니다. 실시간 시세를 계속 받으면서 사고팔아야 하니까 누군가는 계속 돌고 있어야 해요. 미리 만들어둔 파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물건이잖아요. 성질이 정반대입니다.
4편에서 "손님마다 다른 걸 보여줘야 하는 사이트는 정적으로 못 만든다"고 했는데, 이 둘이 딱 그쪽이었어요. 서버 없이 가는 길과 애초에 안 맞는 물건이었던 거죠.
그래서 살리려면 서버를 빌려야 합니다. 매달 돈이 나가고요. 한 달에 한 번 열까 말까 한 도구에 매달 돈을 낼 것인가. 여기서 답이 나왔습니다.
안 살리기로 했어요. 지우지도 않았습니다. 폴더는 그대로 두고, 정말 궁금한 날이 오면 그날 다섯 단계를 밟기로 했어요. 실제로 한 달에 한 번쯤은 그럴 만한 날이 옵니다.
이것도 판단이더라고요. 못 쓰게 된 걸 되살리는 것도, 그냥 두는 것도 각각 값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디에 있었나
오늘 편은 좀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여기선 AI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요.
종목 분석기도 시뮬레이터도 시킨 대로 정확히 만들어졌습니다. 지표 계산도 맞고, 실시간 시세도 잘 받아오고, 지금 켜도 돌아갑니다. 코드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틀린 건 "이걸 만들자"는 결정 자체였습니다. 더 정확히는, 만들 물건의 모양을 정할 때 3주 뒤의 저를 안 넣은 것이요.
이건 AI한테 물어볼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이걸 3주 뒤에도 열까요?"는 저만 아는 겁니다. 제 하루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궁금증이 언제 생기는지, 그때 손에 뭐가 들려 있는지를 아는 쪽이 답해야 하는 질문이에요.
AI는 "만들 수 있느냐"에 굉장히 잘 답합니다. 그래서 대화가 자꾸 그쪽으로 흘러요. 만들 수 있다고 하니까 만들게 되고, 만들어지니까 됐다고 생각하게 되고요.
"만들 수 있느냐"와 "만들 만하냐"는 다른 질문인데, 뒤쪽은 아직 아무도 대신 물어봐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편에서 제일 마음에 걸린 건 이겁니다. 저는 이 둘이 멈춘 걸 모르고 있었어요.
기록을 뒤져서 날짜를 세어보고 나서야 "아, 22일 됐구나" 했습니다. 핵심 기능이 한 번도 안 돌았다는 것도 오늘 알았고요. 만드는 동안에는 그렇게 열심히 봤는데, 멈춘 뒤로는 한 번도 안 돌아봤던 겁니다.
도구를 만드는 일에는 "다 만들었다"는 순간이 있지만, "이게 쓸모가 있나"를 확인하는 순간은 아무도 잡아주지 않아요. 그건 달력에 없거든요. 그래서 이번 편을 쓰면서 정한 게 하나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만든 걸 늘어놓고 마지막으로 연 날짜를 세어보기로 했어요. 오늘 한 게 딱 그거였고, 생각보다 많은 게 나왔습니다.
다음 편에
여기까지가 1부 "생성"이었습니다. 왜 만들기로 했는지, 뭘로 만드는지, 어떻게 시키는지, 어디에 올리는지, 어떤 순서로 만드는지, 그리고 오늘 안 쓰게 된 것들까지요.
다음 편부터는 2부 "프로젝트"입니다. 지금 살아 있는 도구들을 하나씩 뜯어볼게요. 첫 타자는 이 연재에 계속 나온 그 물건, 육아휴직 급여 계산기 — 규칙이 곧 코드입니다. 제도가 바뀌면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 왜 숫자를 코드에 안 적어뒀는지를 자세히 적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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