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80년경(추정) — 생년 불명(180년경 추정).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49년 — 연희 12년(249) 졸(마충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22년 | 백제성 | 한창장 — 이릉 패전 후 병사 5천을 영안으로 보냄 | 기록 |
| 223년 | 성도 | 승상 개부 하독 | 기록 |
| 224년 | 성도 | 승상 개부 하독 | 기록 |
| 225년 | 남중 | 장가태수(주포 반란 뒤 무육) | 기록 |
| 226년 | 남중 | 장가태수(주포 반란 뒤 무육) | 기록 |
| 227년 | 남중 | 장가태수(주포 반란 뒤 무육) | 기록 |
| 228년 | 남중 | 장가태수(주포 반란 뒤 무육) | 기록 |
| 229년 | 남중 | 장가태수(주포 반란 뒤 무육) | 기록 |
| 230년 | 성도 | 승상 참군 영 유부장사 부이 영 주 치중종사 | 기록 |
| 231년 | 성도 | 참군 | 추정 |
| 232년 | 성도 | 참군 | 추정 |
| 233년 | 남중 | 감군·분위장군 → 교강도독 | 기록 |
| 234년 | 남중 | 감군·분위장군 → 교강도독 | 기록 |
| 235년 | 남중 | 감군·분위장군 → 교강도독 | 기록 |
| 236년 | 남중 | 감군·분위장군 → 교강도독 | 기록 |
| 237년 | 남중 | 감군·분위장군 → 교강도독 | 기록 |
| 238년 | 남중 | 감군·분위장군 → 교강도독 | 기록 |
| 239년 | 남중 | 감군·분위장군 → 교강도독 | 기록 |
| 240년 | 남중 | 감군·분위장군 → 교강도독 | 기록 |
| 241년 | 남중 | 감군·분위장군 → 교강도독 | 기록 |
| 242년 | 한중 | 안남장군 → 진남대장군 | 기록 |
| 243년 | 남중 | 진남대장군 | 추정 |
| 244년 | 성도 | 진남대장군 — 성도에서 평상서사 | 기록 |
| 245년 | 남중 | 진남대장군 | 추정 |
| 246년 | 남중 | 진남대장군 | 추정 |
| 247년 | 남중 | 진남대장군 | 추정 |
| 248년 | 남중 | 진남대장군 | 추정 |
| 249년 | 남중 | 진남대장군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0~221년 | 촉한 | 한창장 → 성도령 아래(연대 불명) 효렴 | 불명 |
| 222년 | 촉한 | 한창장 — 이릉 패전 후 병사 5천을 영안으로 보냄 | 기록 |
| 223~224년 | 촉한 | 승상 개부 하독 | 기록 |
| 225~229년 | 촉한 | 장가태수(주포 반란 뒤 무육) | 기록 |
| 230년 | 촉한 | 승상 참군 영 유부장사 부이 영 주 치중종사 | 기록 |
| 231~232년 | 촉한 | 참군 | 추정 |
| 233~241년 | 촉한 | 감군·분위장군 → 교강도독 | 기록 |
| 242년 | 촉한 | 안남장군 → 진남대장군 | 기록 |
| 243년 | 촉한 | 진남대장군 | 추정 |
| 244년 | 촉한 | 진남대장군 — 성도에서 평상서사 | 기록 |
| 245~248년 | 촉한 | 진남대장군 | 추정 |
| 249년 | 촉한 | 진남대장군 | 기록 |
선주가 효정에서 패하자 파서태수 염지가 징발한 5천 병을 영안까지 보내는 임무를 맡아 가고, 선주가 마충을 보고 '황권을 잃었으나 다시 호독(狐篤)을 얻었으니 세상에 현자가 모자라지 않다'고 유파에게 말한다.
정사 마충전: 선주가 오를 칠 때 효정에서 패하자 파서태수 염지가 여러 현의 병사 5천을 징발해 보충하고 마충을 보내 송부하게 했다. 선주는 이미 영안으로 돌아와 마충과 이야기를 나눈 뒤 상서령 유파에게 '황권을 잃었으나 호독(마충의 옛 이름)을 얻었으니 세상에 현자가 모자라지 않다'고 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3 본 「先主已還永安見忠與語謂尚書令劉巴曰雖亡黃權復得狐篤此為世不乏賢也」
남이 호수 유주가 반란해 여러 군을 어지럽히자 장기를 대신해 교강도독이 되어 유주를 베고 남토를 평정, 감군·분위장군에 오른다. 치소를 평이현에서 미현으로 옮겨 민·이 사이에 둔다. 장억과 월휴군의 옛 땅도 되찾는다.
정사 마충전: 11년 남이 호수 유주가 반란해 여러 군을 어지럽혀 교강도독 장기를 불러들이고 마충으로 대신하게 했다. 마충이 유주를 베어 남토를 평정하자 감군·분위장군을 더하고 박양정후에 봉했다. 건녕이 태수 정앙을 죽이고 태수 장예를 오에 묶어 보낸 일 때문에 도독은 늘 평이현에 있었으나 마충에 이르러 치소를 미현으로 옮겨 민·이 사이에 두었다. 월휴군도 오래 땅을 잃었는데 마충이 태수 장억을 이끌고 옛 군을 되찾았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3 본 「忠遂斬冑平南土加忠監軍奮威將軍封博陽亭侯」
위의 조상이 십여만을 이끌고 한천으로 향할 때 비의가 북쪽으로 막으러 가자 마충은 성도에 남아 평상서사를 맡는다.
정사 마충전: 연희 7년 봄 대장군 비의가 북쪽으로 위군을 막으러 가면서 마충을 성도에 남겨 평상서사를 하게 했다. 비의가 돌아오자 마충은 남쪽으로 돌아갔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3 본 「大將軍費韋北禦魏敵留忠成都平尚書事」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80 | 교강도독으로 남이 호수 유주를 베고 남토를 평정했다. 월휴군을 되찾아 안남장군에 올랐다(마충전). |
| 무력 | 71 | 무용 기록은 적다. 장억과 월휴를 되찾고 분강 등지를 토벌했다(마충전). |
| 지력 | 66 | '일 처리에 결단이 있고 위엄과 은혜가 함께 섰다'(마충전). |
| 정치 | 76 | 장가태수로서 반란 뒤 위무했고, 치소를 평이에서 미현으로 옮겨 만이와 백성 사이에 두었다(마충전). |
| 매력 | 78 | '관대하고 도량이 컸다. 웃고 떠들되 노여움을 얼굴에 내지 않았다'(마충전). 죽자 만이도 모두 상정에 와서 눈물을 흘렸다.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마충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