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75년경(추정) — 생년 불명(175년경 추정).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48년 — 연희 11년(248) 졸(왕평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19년 | 한중 | 아문장·비장군(선주에게 항복) | 기록 |
| 228년 | 가정 | 마속의 선봉 소속 → 참군·통오부·토구장군·정후 | 기록 |
| 231년 | 기산 | 참군 — 기산 남쪽 포위를 별도로 지킴 | 기록 |
| 234년 | 오장원 | 참군 — 위연 반란 제압 공 | 기록 |
| 235년 | 한중 | 후전군·안한장군 → 오일 부 이사 영한중태수 | 기록 |
| 236년 | 한중 | 후전군·안한장군 → 오일 부 이사 영한중태수 | 기록 |
| 237년 | 한중 | 후전군·안한장군 → 오일 부 이사 영한중태수 | 기록 |
| 238년 | 한중 | 전호군 → 전감군·진북대장군 | 기록 |
| 239년 | 한중 | 전호군 → 전감군·진북대장군 | 기록 |
| 240년 | 한중 | 전호군 → 전감군·진북대장군 | 기록 |
| 241년 | 한중 | 전호군 → 전감군·진북대장군 | 기록 |
| 242년 | 한중 | 전호군 → 전감군·진북대장군 | 기록 |
| 243년 | 한중 | 전호군 → 전감군·진북대장군 | 기록 |
| 244년 | 한중 | 진북대장군 — 조상군 격퇴 | 기록 |
| 245년 | 한중 | 진북대장군 | 추정 |
| 246년 | 한중 | 진북대장군 | 추정 |
| 247년 | 한중 | 진북대장군 | 추정 |
| 248년 | 한중 | 진북대장군 | 추정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0~213년 | 위 | 두호·박호를 따라 낙양에 감(교위 가칭) | 불명 |
| 214~218년 | 위 | (조조 휘하, 한중 전쟁 종군) | 불명 |
| 219년 | 촉한 | 아문장·비장군(선주에게 항복) | 기록 |
| 220~227년 | 촉한 | 아문장·비장군 | 불명 |
| 228년 | 촉한 | 마속의 선봉 소속 → 참군·통오부·토구장군·정후 | 기록 |
| 229~230년 | 촉한 | 참군·통오부 | 불명 |
| 231년 | 촉한 | 참군 — 기산 남쪽 포위를 별도로 지킴 | 기록 |
| 232~233년 | 촉한 | 참군·통오부 | 불명 |
| 234년 | 촉한 | 참군 — 위연 반란 제압 공 | 기록 |
| 235~237년 | 촉한 | 후전군·안한장군 → 오일 부 이사 영한중태수 | 기록 |
| 238~243년 | 촉한 | 전호군 → 전감군·진북대장군 | 기록 |
| 244년 | 촉한 | 진북대장군 — 조상군 격퇴 | 기록 |
| 245~248년 | 촉한 | 진북대장군 | 추정 |
두호·박호를 따라 낙양에 갔다가 조조의 한중 원정에 종군하고, 이어 선주에게 항복해 아문장·비장군이 된다.
정사 왕평전: 본래 외가 하씨에게 양육되다 뒤에 왕씨로 복성했다. 두호·박호를 따라 낙양에 가서 교위를 가칭받고, 조조를 따라 한중을 칠 때 선주에게 항복해 아문장·비장군이 되었다. 항복 연도는 본문에 없어 조조의 한중 원정(219)으로 둠.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3 본 「隨杜濩樸胡詣洛陽假校尉從曹公征漢中因降先主拜牙門將裨將軍」
마속이 물가를 버리고 산 위에 진을 치는 등 조치가 혼란스러워 여러 차례 간했으나 듣지 않아 크게 패한다. 홀로 천 명을 이끌고 북을 울려 장합이 복병을 의심하게 하고, 흩어진 진영을 서서히 수습해 돌아온다. 제갈량이 마속·장휴·이성을 벤 뒤 왕평을 특별히 높여 참군·통오부·토구장군으로 삼는다.
정사 왕평전: 건흥 6년 참군 마속의 선봉에 속했다. 마속이 물을 버리고 산에 오르는 등 일 처리가 번잡하자 왕평이 여러 번 간했으나 마속이 따르지 않아 가정에서 대패했고 무리가 모두 흩어졌다. 오직 왕평이 이끄는 천 명만 북을 울리며 버텨 위의 장합이 복병이 있을까 의심해 핍박하지 않았다. 왕평이 서서히 여러 영의 남은 병사를 모아 장병을 이끌고 돌아왔다. 제갈량이 마속과 장휴·이성을 벤 뒤 왕평을 특별히 숭현해 참군을 더하고 오부를 통솔하며 영을 맡게 하고 토구장군으로 진위하여 정후에 봉했다.
연의: 연의 95회 — 연의 95회에서도 왕평이 마속을 말리다 따르지 않는 줄거리가 같다.
관련: 가정 전투와 읍참마속
출전: 三國志 卷43 본 「謖捨水上山舉措煩擾平連規諫謖謖不能用大敗於街亭眾盡星散惟平所領千人鳴鼓自持魏將張郃疑其伏兵不往逼也」
위 조상이 보기 십여만으로 한천을 향하고 선봉이 낙곡에 이르렀을 때, 한중 수비병이 3만이 못 되자 제장은 한성·낙성에 고수하자 했으나 왕평은 '한중에서 부까지는 천 리, 관을 잃으면 화가 크다'며 유민·두기에게 먼저 흥세를 점거하게 하고 자신이 후방을 맡는 계책을 쓴다. 비의가 성도에서 이어 와 위군이 물러난다.
정사 왕평전: 연희 7년 봄 위 대장군 조상이 보기 10여만으로 한천을 향했고 전봉은 이미 낙곡에 있었다. 한중 수비병은 3만이 못 되어 제장이 크게 놀랐다. 어떤 이는 한·락 두 성을 고수하자 했으나 왕평은 '한중에서 부까지 천 리나 되니 적이 관을 얻으면 화가 된다. 지금 먼저 유 호군과 두 참군을 보내 흥세를 점거하고 내가 뒤에서 막겠다. 적이 황금으로 나뉘어 향하면 내가 천 명으로 직접 내려가 맞겠다'고 했다. 호군 유민만 뜻이 같아 즉시 시행했다. 부의 여러 군이 성도의 비의와 함께 이어 도착하자 위군은 왕평의 본 계책대로 물러났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3 본 「漢中去涪垂千里賊若得關便為禍也今宜先遣劉護軍杜參軍據興勢平為後拒」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86 | 위 대군이 한중에 닥쳤을 때 홍세를 먼저 점거해 조상의 군을 물렸다(왕평전). |
| 무력 | 77 | 가정 패전 때 천명 병사가 북을 울려 장합이 복병을 의심하게 하고 흩어진 군을 수습했다(왕평전). |
| 지력 | 69 | 한중 방어에 '먼저 흥세를 점령하라'는 계책을 세웠고, 조상군이 그대로 물러났다(왕평전). |
| 정치 | 63 | 제갈량 사후 한중 태수를 겸하며 한중을 맡았다(왕평전). |
| 매력 | 64 | 글자를 거의 몰랐으나 말로 지은 글에 이치가 있었다. 법도를 지키고 단정했다(왕평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왕평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