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79년 — 건안 19년(214) 36세 졸에서 역산(방통전)
사망 214년 — 건안 19년(214) 낙성(雒縣) 공성 중 유시에 맞아 사망(방통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10년 | 오(오군) | 주유 상여를 오까지 호송 | 기록 |
| 212년 | 부성 | 군사중랑장 | 기록 |
| 214년 | 낙성 | 군사중랑장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197년 | 유표 | (양양 거주, 사마휘 등과 교유 — 연대 불명) | 불명 |
| 198~208년 | 유표 | 군 공조(남군) | 불명 |
| 209년 | 오 | 주유 휘하 공조(주유가 남군태수를 겸임) | 불명 |
| 210년 | 오 | 주유 상여를 오까지 호송 | 기록 |
| 211년 | 촉한 | 치중종사·군사중랑장 → 입촉 수행 | 불명 |
| 212년 | 촉한 | 군사중랑장 | 기록 |
| 213년 | 촉한 | 군사중랑장 | 불명 |
| 214년 | 촉한 | 군사중랑장 | 기록 |
주유가 죽자 상여를 오까지 호송하고, 오군 인사들(육적·고소·전종)과 어울려 사람을 평한다.
정사 방통전: 주유가 죽자 방통이 상여를 호송해 오에 이르렀고, 서쪽으로 돌아가려 할 때 창문 밖에서 육적·고소·전종 등이 전송했다. 방통은 이들을 두고 사람 됨됨이를 평했다.
연의: 연의 57회
출전: 三國志 卷37 본 「吳將周瑜助先主取荊州因領南郡太守瑜卒統送喪至吳吳人多聞其名」
뇌양령이 되었으나 다스리지 못해 면직된다. 노숙·제갈량의 천거로 선주에게 중용되어 치중종사가 된다.
정사 방통전: 방통이 뇌양령으로 현을 다스리지 못해 면직됐다. 노숙이 선주에게 '방사원은 백리의 재목이 아니다'라 서신을 보내고 제갈량도 말하자, 선주가 면담하고 크게 쓰며 치중종사로 삼았다. 연도는 본문에 없다.
연의: 연의 57회
출전: 三國志 卷37 본 「先主領荊州統以從事守耒陽令在縣不治免官吳將魯肅遺先主書曰龐士元非百里才也」
부에서 유장을 잡자는 상계를 올렸으나 선주가 받아들이지 않는다. 뒤에 상·중·하 세 계책을 올려 중계를 택하게 한다.
정사 방통전: 선주와 유장이 부에서 만났을 때 방통이 '이 자리에서 유장을 붙잡자'고 권했으나 선주는 은신이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이후 방통은 정병으로 성도를 기습하는 상계, 양회·고패를 불러 사로잡고 성도로 가는 중계, 백제로 물러나는 하계를 올렸고, 선주는 중계를 따랐다.
연의: 연의 61회
출전: 三國志 卷37 본 「先主然其中計即斬懷沛還向成都所過輒克」
낙현(雒縣) 포위 중 성을 치다 유시에 맞아 36세로 죽는다. 관내후·정후(靖侯) 시호를 받는다.
정사 방통전: 선주가 낙현을 포위하자 방통이 군을 이끌고 성을 공격하다가 유시에 맞아 죽었고, 이때 36세였다. 선주가 애통해 말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관내후에 추증하고 정후라 시호했다.
연의: 연의 63회
출전: 三國志 卷37 본 「進圍雒縣統率眾攻城為流矢所中卒時年三十六」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80 | 군을 이끌고 낙현 공성을 지휘하다 유시에 맞아 죽었다(방통전). 군사중랑장으로 제갈량과 나란히 올랐다. |
| 무력 | 50 | 직접 무용 기록은 없다. 낙현 성을 칠 때 앞서 군을 이끌었다는 서술만 있다(방통전). |
| 지력 | 97 | 상·중·하 세 계책을 올려 선주가 중계를 택했다(방통전). 사마휘가 '남주 사인의 으뜸'이라 칭했다. |
| 정치 | 63 | 내정 기록은 적고 뇌양령 시절 '고을을 다스리지 못해 면직'됐다(방통전). |
| 매력 | 72 | 노숙이 '방사원은 백리의 재목이 아니다'라 선주에게 추천했고, 선주가 깊이 대접했다(방통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방통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