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70년경(추정) — 생년 불명(170년경 추정).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23년 — 건흥 원년(223) 남정에 반대하던 중 졸(왕련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16년 | 성도 | 사염교위 → 촉군태수·흥업장군 | 기록 |
| 217년 | 성도 | 사염교위 → 촉군태수·흥업장군 | 추정 |
| 218년 | 성도 | 사염교위 → 촉군태수·흥업장군 | 추정 |
| 219년 | 성도 | 사염교위 → 촉군태수·흥업장군 | 추정 |
| 220년 | 성도 | 사염교위 → 촉군태수·흥업장군 | 추정 |
| 221년 | 성도 | 사염교위 → 촉군태수·흥업장군 | 추정 |
| 222년 | 성도 | 사염교위 → 촉군태수·흥업장군 | 추정 |
| 223년 | 성도 | 둔기교위·영승상장사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0~210년 | 유장·익주 | 재동령 | 불명 |
| 211~213년 | 유장·익주 | 재동령 — 선주 진군에 성을 닫음 | 불명 |
| 214~215년 | 촉한 | 십방령 → 광도령 | 불명 |
| 216년 | 촉한 | 사염교위 → 촉군태수·흥업장군 | 기록 |
| 217~222년 | 촉한 | 사염교위 → 촉군태수·흥업장군 | 추정 |
| 223년 | 촉한 | 둔기교위·영승상장사 | 기록 |
선주가 가맹에서 진군해 오자 재동령으로서 성문을 닫고 항복하지 않아 선주가 그 의리를 높이 여겨 강요하지 않았다. 연도는 본문에 없어 선주 진공기(212~213년)로 추정.
정사 왕련전: 유장 때 입촉하여 재동령이 되었다. 선주가 가맹에서 일을 일으켜 남쪽으로 진군해 오자 왕련은 성문을 닫고 항복하지 않았고, 선주가 이를 의롭게 여겨 강요하지 않았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1 본 「先主起事葭萌進軍來南連閉城不降先主義之不強逼也」
사염교위로서 염철의 이익을 가려 국용에 크게 보태고, 여예·두기·유간 등 훗날 대관이 된 인재를 관속으로 뽑는다. 연도는 본문에 없어 추정.
정사 왕련전: 성도가 평정된 뒤 십방령, 광도령을 거쳐 사염교위가 되어 염철의 이익을 계산하고 거둬 들이니 국용에 도움이 많았다. 이에 좋은 인재를 관속으로 골랐는데 여예·두기·유간 등이 모두 뒤에 대관에 이르렀으니 왕련이 뽑은 사람들이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1 본 「遷司鹽校尉較鹽鐵之利利入甚多有裨國用於是簡取良才以為官屬若呂乂杜祺劉干終皆至大官自連所拔也」
제갈량이 남방을 직접 정벌하려 하자 '불모의 땅, 역려의 고장이라 한 나라의 명망으로 위험을 무릅쓸 곳이 아니다'라 간절히 말려 출정이 오래 지체되다가 죽는다.
정사 왕련전: 남방 여러 군이 복속하지 않아 제갈량이 직접 정벌하려 하자 왕련은 '이곳은 불모의 땅, 역려의 고장이니 한 나라의 명망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는 안 된다'고 간했다. 제갈량은 장수들의 재주가 자신에 못 미칠까 염려해 반드시 가려 했으나 왕련의 말이 간절해 오래 머무르게 되었다. 마침 왕련이 죽었다.
연의: 연의 87회
출전: 三國志 卷41 본 「時南方諸郡不賓諸葛亮將自征之連諫以為此不毛之地疫癘之鄉不宜以一國之望冒險而行」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평가 불가 | 군 지휘 기록 없음. |
| 무력 | 평가 불가 | 무용 기록 없음. |
| 지력 | 66 | 제갈량의 직접 남정을 '불모의 땅, 역려의 고장'이라며 간해 출정을 지연시켰다(왕련전). |
| 정치 | 76 | 사염교위로서 염철 이익을 많이 늘려 국용을 도왔고, 여예·두기·유간 등 좋은 인재를 관속으로 뽑았다(왕련전). |
| 매력 | 57 | 유장 때 재동령으로 선주의 진군에도 성문을 닫고 항복하지 않아 선주가 의롭다 여겼다(왕련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왕련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