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연(魏延) — 정사 삼국지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촉한출생 175년경(추정)사망 234년기록 연도 3해

생몰

출생 175년경(추정) — 생년 불명(175년경 추정).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34년 — 건흥 12년(234) 남곡구에서 군이 흩어진 뒤 한중으로 달아나다 마대에게 베임(위연전)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19년한중독한중·진원장군·한중태수기록
220년한중독한중·진원장군·한중태수추정
221년한중진북장군추정
222년한중진북장군추정
223년한중진북장군·도정후추정
224년한중진북장군·도정후추정
225년한중진북장군·도정후추정
226년한중진북장군·도정후추정
227년한중독전부·영승상사마·양주자사기록
231년한중전군사·정서대장군추정
232년한중전군사·정서대장군추정
233년한중전군사·정서대장군추정
234년오장원전군사(군 철수 때 단후 지시를 거부)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11~218년촉한(부곡을 이끌고 선주를 따라 입촉 — 연대 불명)불명
219년촉한독한중·진원장군·한중태수기록
220년촉한독한중·진원장군·한중태수추정
221~222년촉한진북장군추정
223~226년촉한진북장군·도정후추정
227년촉한독전부·영승상사마·양주자사기록
228~229년촉한독전부·영승상사마·양주자사불명
230년촉한전군사·정서대장군·남정후불명
231~233년촉한전군사·정서대장군추정
234년촉한전군사(군 철수 때 단후 지시를 거부)기록

나온 사건·전투

219년 · 독한중·진원장군·한중태수 · 승진

유비가 한중왕이 되어 도읍을 성도로 옮기자 장비가 아닌 위연이 독한중·진원장군·한중태수로 발탁되어 한중을 맡는다. '조조가 와도 막고 10만이 와도 삼키겠다'고 답했다.

정사 위연전: 선주가 한중왕이 되어 성도로 옮기며 한중을 지킬 중장을 두려 할 때 모두 장비로 여겼으나, 선주는 위연을 독한중·진원장군·한중태수로 뽑아 한 군이 모두 놀랐다. 위연은 '조조가 천하를 들고 와도 막고, 부장이 10만으로 오면 삼키겠다'고 답했다.

연의: 연의 73회

출전: 三國志 卷40 본 「先主乃拔延爲督漢中鎮遠將軍領漢中太守一軍盡驚」

227년 · 독전부·영승상사마·양주자사 · 승진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자 독전부·영승상사마·양주자사가 된다. 북벌 때마다 만 명을 달라고 청해 동관 기습을 건의했으나 제갈량은 허락하지 않았다.

정사 위연전: 건흥 5년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면서 위연을 독전부·영승상사마·양주자사로 삼았다. 위연은 늘 제갈량을 따라 나올 때 군사 1만을 주면 다른 길로 가 동관에서 만나겠다며 한신의 고사를 청했으나 제갈량이 제지해 허락하지 않았다.

연의: 연의 92회

출전: 三國志 卷40 본 「五年諸葛亮駐漢中更以延爲督前部領丞相司馬涼州刺史」

227년 · 독전부·영승상사마·양주자사 · 계책

자오곡 기습책: 정병 5천과 군량 5천으로 포중에서 진령을 따라 자오곡으로 나가 열흘 안에 장안을 칠 수 있다고 건의했으나 쓰이지 않았다. 연도는 1차 북벌 전(227년경)으로 추정.

정사 위연전 주 위략: 위연이 하후무가 장안을 맡고 있다는 점을 들어 포중에서 진령을 따라 자오곡으로 북상하면 열흘이면 장안에 이르고 하후무는 도망할 것이라 했으나, 제갈량이 위험하다고 보아 평탄한 길을 택해 쓰지 않았다. 위략의 기록이라 본문이 아닌 배송지 주에 있다. 연도는 주에 없다.

연의: 연의 92회 — 연의 92회는 위연의 건의를 제갈량이 거절하는 장면을 극화한다.

출전: 三國志 卷40 주 「今假延精兵五千負糧五千直從褒中出循秦嶺而東當子午而北不過十日可到長安」

230년 · 전군사·정서대장군·남정후 · 대승

서쪽 강중으로 들어가 양계에서 위의 후장군 비요와 옹주자사 곽회를 대파하고 전군사·정서대장군·남정후에 오른다. 본문의 '8년'은 건흥 8년(230).

정사 위연전: 건흥 8년 위연을 서쪽 강중으로 보냈다. 위의 후장군 비요와 옹주자사 곽회가 양계에서 위연과 싸웠고 위연이 크게 깨뜨려 전군사·정서대장군으로 옮기고 가절을 받아 남정후에 봉해졌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0 본 「八年使延西入羌中魏後將軍費瑤雍州刺史郭淮與延戰於陽谿延大破淮等遷爲前軍師」

234년 · 전군사(군 철수 때 단후 지시를 거부) · 사망

제갈량 사후 철군 때 단후를 거부하고 양의와 충돌한다. 남곡구에서 하평의 꾸짖음에 군이 흩어지고 한중으로 달아나다 마대에게 베이며 삼족이 멸해진다.

정사 위연전: 제갈량이 죽자 양의가 철군을 시작했고 위연은 남쪽으로 앞서 돌아가며 잔도를 불태웠다. 양쪽이 서로 반역이라 표를 올렸고, 위연은 남곡구에서 양의를 막으려 했으나 하평이 '공이 죽은 지 몸이 식지도 않았다'고 꾸짖자 군사들이 흩어졌다. 양의가 마대를 보내 위연을 추격해 베었다.

연의: 연의 105회 — 연의 105회의 '반골'이나 마대에게 계략을 맡겼다는 설정은 연의 창작이다.

출전: 三國志 卷40 본 「儀遣馬岱追斬之致首於儀儀起自踏之曰庸奴復能作惡不遂夷延三族」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88한중 방어와 양계 격파로 전군사·정서대장군에 올랐다. 북벌 때 선봉을 맡았다(위연전).
무력91선주 때부터 입촉 후 여러 전공이 있어 아문장군이 되었고, 양계에서 곽회·비요를 대파했다(위연전).
지력66자오곡 기습책을 냈으나 제갈량이 위험하다 하여 쓰지 않았다(위연전 주 위략).
정치50한중 태수로서 제갈량 사후 철군 지휘권을 두고 양의와 충돌해 내란에 이르렀다(위연전).
매력50'성격이 긍고(矜高)하여 모두가 피했고 양의만 양보하지 않아 물과 불 같았다'(위연전).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위연의 이동 경로

촉한 소속 다른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