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89년 — 39세 졸(마량전)에서 역산
사망 228년 — 건흥 6년(228) 가정 패전 뒤 하옥되어 사망(마량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23년 | 백제성 | 참군 | 기록 |
| 224년 | 성도 | 참군 | 기록 |
| 225년 | 성도 | 참군(남중 정벌 전송) | 기록 |
| 226년 | 한중 | 참군 | 추정 |
| 227년 | 한중 | 참군 | 추정 |
| 228년 | 가정 | 참군 — 선봉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9~208년 | 기타·재야 | (양양 마씨 형제 — 연대 불명) | 불명 |
| 209~210년 | 촉한 | 형주종사 | 불명 |
| 211~213년 | 촉한 | 형주종사(입촉 수행) | 불명 |
| 214~222년 | 촉한 | 면죽·성도령 → 월휴태수 | 불명 |
| 223~224년 | 촉한 | 참군 | 기록 |
| 225년 | 촉한 | 참군(남중 정벌 전송) | 기록 |
| 226~227년 | 촉한 | 참군 | 추정 |
| 228년 | 촉한 | 참군 — 선봉 | 기록 |
선주가 임종하며 제갈량에게 '마속은 말이 지나치게 앞서니 크게 쓰지 말라'고 당부한다. 제갈량은 그렇게 여기지 않고 참군으로 삼아 밤낮 담론했다.
정사 마량전: 선주가 죽을 때 제갈량에게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지나쳐 크게 쓸 수 없으니 살피라'고 했으나, 제갈량은 아니라 여겨 마속을 참군으로 삼고 자주 불러 낮부터 밤까지 이야기했다.
연의: 연의 85회
출전: 三國志 卷39 본 「先主臨薨謂亮曰馬謖言過其實不可大用君其察之」
제갈량이 남중을 정벌하러 갈 때 수십 리 전송하며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상책, 성을 공략하는 것이 하책'이라 건의한다. 제갈량이 이를 받아들여 맹획을 놓아주었다. 건흥 3년.
정사 마량전 주 양양기: 건흥 3년 제갈량이 남중을 정벌할 때 마속이 수십 리를 전송했다. 제갈량이 좋은 계책을 청하자 마속은 '용병의 도는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상, 성을 공략하는 것이 하'라며 마음을 복종시키라고 했다. 제갈량이 계책을 받아들여 맹획을 놓아주어 남방을 복속시켰다.
연의: 연의 87회 — 연의 87~90회의 칠종칠금은 정사에 없는 이야기이며 양양기의 '맹획을 놓아주었다'는 한 줄이 원형이다.
출전: 三國志 卷39 주 「夫用兵之道攻心為上攻城為下心戰為上兵戰為下」
제갈량이 위연·오일 등 숙장을 제치고 선봉으로 발탁했으나 가정에서 장합에게 패해 군이 흩어진다. 하옥되어 죽고 제갈량이 눈물을 흘린다.
정사 마량전: 건흥 6년 제갈량이 기산으로 나올 때 위연·오일 등 숙장이 있어 선봉으로 합당하다고 했으나 제갈량은 중론을 어기고 마속을 발탁해 대군을 이끌고 앞서게 했다. 가정에서 장합에게 패해 사졸이 흩어졌고, 제갈량은 의지할 데가 없어 한중으로 물러났다. 마속은 하옥되어 죽었고 제갈량이 눈물을 흘렸다.
연의: 연의 95회 — 연의 95~96회의 '읍참마속'은 정사 마량전에 같은 줄거리(하옥·옥사·제갈량의 눈물)가 있다.
관련: 가정 전투와 읍참마속
출전: 三國志 卷39 본 「亮違眾拔謖統大眾在前與魏將張郃戰於街亭為郃所破士卒離散」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6 | 가정에서 선봉을 맡았으나 장합에게 패해 군이 흩어졌다(마량전). |
| 무력 | 평가 불가 | 무용 기록 없음. |
| 지력 | 73 | '재주와 그릇이 남보다 뛰어나고 군략을 즐겨 논했다'(마량전). 남중 정벌 때 '마음을 공략하라'는 계책을 냈다(양양기). |
| 정치 | 50 | 현령·태수 경력이 있으나 정무 기록은 적다(마량전). |
| 매력 | 60 | 제갈량이 깊이 아꼈으나 선주는 '말이 지나치게 앞서니 크게 쓰지 말라'고 유언했다(마량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마속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