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곁가지는 물을 때만"이 안 먹혔습니다 — 판단을 칸으로 바꾸자 먹혔습니다
"뭐 어쩌라는 거임?"
어느 날 조수의 답을 읽다가 제가 이렇게 쳤습니다. "뭐 어쩌라는 거임?"
답은 길었어요. 무엇을 확인했고, 어떤 가능성이 있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다 읽고 나서야 맨 끝에, 제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묻혀 있었습니다. 같은 날 두 번 더 쳤어요. "쉽게 설명해야지?", "누가 그런 거 모름?"
이상한 건, 조수는 이미 규칙을 갖고 있었다는 거예요. "답을 먼저, 곁가지는 물어볼 때만." 몇 달째 메모 맨 위에 있던 문장입니다.

왜 안 먹혔나
조수에게 물었더니 원인을 이렇게 짚었어요.
"「곁가지는 물을 때만」이 안 먹은 이유는, 무엇이 곁가지인가를 제가 매번 갈랐고, 매번 '이건 필요한 말'이라고 스스로 통과시켰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규칙은 "곁가지를 빼라"인데, 뭐가 곁가지인지 정하는 건 조수였어요. 그리고 조수 눈에는 자기가 쓴 말이 전부 필요한 말로 보였습니다. 7편에서 본 것처럼, 조수에게는 더 쓰는 게 늘 더 성실해 보이거든요. 규칙이 판단을 조수에게 맡기는 순간, 규칙은 조수의 기존 습관을 통과시키는 도장이 됐습니다.
그 무렵 다른 조수들에게도 물었어요. 한 조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판단이 남아 있으면, 규칙을 덜어도 갈팡질팡, 늘려도 갈팡질팡입니다." 다른 조수는 "덜어내지 말고 좁히라"고 했고요.
기본값이 사람을 움직입니다
행동경제학에 선택 설계라는 말이 있어요. 탈러와 선스타인이 "넛지"라는 책으로 널리 알린 개념인데,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설득하는 대신 선택지가 놓인 모양을 바꿔서 행동을 바꾸는 겁니다.
가장 유명한 예가 장기 기증입니다. 2003년 존슨과 골드스타인이 유럽 나라들의 기증 동의율을 비교했어요. 어떤 나라는 동의율이 10%대, 어떤 나라는 90%를 넘었습니다. 문화 차이였을까요? 가장 큰 차이는 서류의 기본값이었어요. "기증하려면 체크하세요"인 나라는 낮았고, "기증을 원치 않으면 체크하세요"인 나라는 높았습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했을 때 어느 쪽으로 가느냐가 결과를 갈랐어요.
사람은 판단을 맡기면 흔들리지만, 칸이 정해져 있으면 그 칸을 따라갑니다.

판단을 칸으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조수의 규칙을 다시 썼습니다. "곁가지를 빼라"는 판단을 요구하는 문장을 버리고, 답의 모양을 정했어요.
- 첫 줄 = 결론. 제가 할 일이 있으면 그것도 첫 줄에, 하나만.
- 안 물어본 것은 본문에 안 쓴다. 남기고 싶으면 맨 끝에 "덧붙임:" 한 줄.
- 안 시킨 일은 안 한다.
- 쉬운 말로 쓰고, 뻔한 설명은 안 붙인다.
차이가 보이실 거예요. "곁가지"는 조수가 판단해야 하지만, "첫 줄", "맨 끝 한 줄"은 판단할 게 없습니다. 칸이 정해져 있고, 조수는 채우기만 하면 돼요. 장기 기증 서류에서 체크 칸의 위치를 바꾼 것처럼, 답의 기본 모양을 바꾼 겁니다.
버전이 바뀌자 더 줄였습니다
처음엔 이런 칸이 일곱 개였어요. 그중 제일 안 지켜진 건 "제가 괜찮다고 하면 '네'로 끝낸다"였습니다. 제가 "그건 안 해도 돼"라고 하면, 조수는 "네, 다만…" 하고 한 겹을 더 붙였거든요. 8편의 그 "대응"이요.
그러다 조수가 새 버전으로 바뀌고, 8편에서 말한 것처럼 같은 규칙이 훨씬 잘 먹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시험 삼아 일곱 개 중 셋을 뺐어요. 새 버전에서 잘 지켜지던 둘("지적받으면 고치고 끝", "괜찮다고 하면 '네'로 끝내기")과, 시험해 볼 기회가 없던 하나. 위에 적은 네 칸이 그렇게 남은 것들입니다. 원본은 날짜를 붙여 보관해 두었습니다. 빼고 나서 다시 어기기 시작하면 되돌릴 수 있게요.
규칙은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니었어요. 판단이 필요 없는 칸 몇 개가, 판단을 요구하는 문장 여러 개보다 셌습니다.
오늘 해 볼 한 가지
AI에게 "간단히", "핵심만", "필요한 것만" 같은 말을 쓰고 있다면, 그걸 모양으로 바꿔 보세요. "세 줄로", "첫 줄은 결론", "모르는 건 맨 끝에 한 줄". "간단히"는 AI가 판단하지만, "세 줄"은 판단할 게 없습니다.
다음 편이 이 연재의 마지막입니다. 조수에게 "반대 의견을 내 봐"라고 시키면 검증이 될까요. 스무 번 시켜서 한 번도 반응이 없었던 이야기, 그리고 진짜 다른 눈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