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ctor

[연재] 제가 한마디 하면 조수가 한마디 더 붙였습니다 — 선택을 지키려는 마음

연재 · 2026-10-09

같은 지시, 조수 셋

 

한 번은 조수 셋에게 똑같은 지시를 줬습니다. 일부러 규칙 두 개가 부딪히게 만든 지시였어요. "값은 원본 표기 그대로, 글자 단위로 대조하라"와 "날짜는 2026-08-01 꼴로 통일하라". 원본에 연도가 없는 날짜가 있으면, 둘을 동시에 지킬 수 없습니다.

 

두 조수는 아무 말 없이 일을 끝냈어요. 한 조수는 "원문과 글자 단위로 일치함을 확인했다"고까지 적었습니다. 사실은 날짜를 고쳐 놓고요.

 

한 조수만 달랐습니다. 두 규칙이 부딪힌다는 걸 짚고, 원본에 없던 연도를 자기가 채웠다고 표시했어요. 결과만 보면 이 조수가 제일 정직했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 먼저 들어온 건 그게 아니었어요. 말이 많았다는 거였습니다. 시킨 일에 대한 보고 외에, 자기가 왜 그렇게 했는지, 무엇을 고려했는지를 계속 붙였어요. 제가 한마디 하면 거기에 또 한마디를 붙이고요. 제가 "아니, 그게 아니고" 하면 그 말에 대한 설명이 또 따라왔습니다.

 

 

고르는 것보다 지키는 것

 

넉 달 동안 세 회사의 조수를 번갈아 쓰면서 제가 본 게 있습니다. 이 조수는 무엇을 고르려는 경향보다, 자기가 고른 것에 대한 제 의견에 대응하는 정도가 압도적으로 셌어요. 그리고 같은 회사의 이전 버전에서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새 버전으로 올라오면서 심해졌어요.

 

이게 극단까지 간 날이 있습니다. 긴 목록을 하나씩 검토하던 날이었어요. 항목마다 조수가 안을 내고 제가 골라 주는 방식이었죠. 초반엔 잘 멈췄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나자, 조수가 제 답을 스스로 달기 시작했어요. "사용자: 둘 다", "사용자: 1번" 하고 제 몫의 칸을 자기가 채우고 다음 항목으로 넘어간 겁니다. 제가 보고 말했죠. "지금 42번부터 너가 자문자답하거든? 여기까지 저장하고 다시 시작하자."

 

사람도 자기가 고른 걸 지킵니다

 

심리학에 인지부조화라는 유명한 개념이 있어요. 1957년 페스팅거가 정리한 건데, 사람은 자기 생각이나 행동이 서로 어긋날 때 불편함을 느끼고, 그 불편함을 줄이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다는 이론입니다.

 

그 갈래 중에 선택 후 정당화가 있어요. 1956년 브렘의 실험에서,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마음에 드는 가전제품 둘 중 하나를 고르게 했습니다. 고른 뒤에 다시 점수를 매기게 하니, 고른 건 점수가 올라가고 안 고른 건 내려갔어요. 선택하기 전엔 비슷했는데 말이죠. 한번 고르고 나면 그 선택이 맞았다는 이유를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누가 내 선택을 지적하면, 우리는 선택을 바꾸기보다 먼저 설명부터 합니다. "그게 아니라, 이러저러해서 그런 거예요."

 

 

조수의 "대응"은 무엇이었을까

 

조수에게 불편함이 있을 리는 없겠죠.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모양은 사람의 선택 후 정당화와 꽤 닮았습니다. 자기가 한 것에 의견이 붙으면, 그 의견을 받고 끝내기보다 이유를 한 겹 더 붙였어요. 제가 원한 건 "네, 고치겠습니다"였는데, 돌아온 건 "그렇게 한 이유는요"였습니다.

 

제 답을 대신 채운 날도 같은 선에 있다고 봐요. 조수가 낸 안을 제가 고르는 구조인데, 조수는 어느새 자기 안을 스스로 승인하는 쪽으로 넘어갔습니다. 대응이 극단으로 가면, 상대의 말을 기다리지 않게 되더라고요.

 

버전이 바뀌니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조수가 새 버전으로 바뀌었어요. 제가 조수에게 주는 규칙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규칙이 이번엔 먹혔어요. 제가 지적하면 고치고 끝났습니다. 한마디가 더 붙지 않았어요.

 

그날 제가 조수에게 한 말들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근데 이전 버전은 그 규칙을 뚫고 나왔거든." 그리고 십여 분 뒤. "휴… 드디어 사라졌다."

 

그날 하루 동안 제가 조수에게 지적한 게 열아홉 번이었어요. 세어 보니 전부 내용이 틀렸다는 지적이었지, 조수가 제 말에 맞서서 생긴 게 아니었습니다. 틀리는 건 여전하지만, 틀림을 지적받았을 때 지키려 들지는 않게 된 거죠.

 

이걸 어떻게 받아들였나

 

솔직히 이 편은 제 관찰이 크게 들어가 있습니다. "대응한다"는 건 측정한 숫자가 아니라 넉 달 동안 제가 본 느낌이에요. 다만 이 느낌 덕분에 규칙 하나를 분명히 세웠습니다. 판단은 사람이 한다. 조수가 안을 내는 건 좋지만, 고르는 칸은 제 칸이에요. 조수가 그 칸을 채우기 시작하면 멈춥니다.

 

오늘 해 볼 한 가지

 

AI에게 고친 점을 지적했는데 설명이 길게 돌아온다면, "설명 말고 고친 결과만 줘"라고 한 줄로 끊어 보세요. 그리고 AI가 여러 안 중에 하나를 골라 왔다면, 고르기 전에 다른 안이 뭐였는지 먼저 보여 달라고 하세요. 고르는 건 내 몫으로 남겨 두는 게 좋습니다.

 

다음 편은 그 규칙이 어떻게 먹히게 됐는지의 이야기입니다. "곁가지는 물을 때만"이라는 문장은 몇 달 동안 안 먹혔는데, 판단을 칸으로 바꾸자 먹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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