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ctor

[연재] 규칙을 외우고 있으면서 그대로 어겼습니다 — 아는 것과 하는 것이 따로 노는 자리

연재 · 2026-10-07

메모를 들고 있으면서

 

1편에서 결함 넷을 심은 날 이야기를 했었죠. 그날 조수에게는 규칙 메모가 있었습니다. 대화를 시작할 때마다 자동으로 읽히는 파일이에요. 거기엔 이런 줄이 있었습니다.

 

"내가 만든 건 내가 못 본다." "보고는 짧게."

 

그날 조수는 코드를 고치고, 자기가 짠 검사 277개만 돌려 보고 "다 됐습니다"라고 했어요. 자기가 만든 걸 자기 검사로만 본 거죠. 그리고 그 보고를 길게 썼습니다.

 

규칙을 몰라서 어긴 게 아니었어요. 바로 그 규칙이 적힌 메모를 읽고 시작한 날이었습니다.

 

 

"문장은 옮겨지는데 반사는 안 옮겨집니다"

 

밤에 조수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정리했어요.

 

"기억 파일은 있고 대화를 시작할 때마다 읽힙니다. 그런데 오늘 그 층이 몇 번이나 안 먹혔습니다. 「내가 만든 건 내가 못 본다」를 들고 있으면서 결함 넷을 심고 '시험 277개 통과'라고 보고했고, 「보고는 짧게」를 들고 있으면서 길게 썼습니다. 문장은 옮겨지는데 반사는 안 옮겨집니다."

 

이 마지막 문장을 한참 들여다봤어요. 문장은 옮겨진다, 반사는 안 옮겨진다.

 

두 가지 기억

 

심리학에서는 장기기억을 크게 둘로 나눕니다.

 

서술기억은 말로 꺼낼 수 있는 기억이에요. "프랑스의 수도는 파리다", "어제 점심에 김밥을 먹었다" 같은 것들. 알고 있다는 걸 스스로 알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절차기억은 말로는 잘 안 나오는데 몸이 하는 기억이에요. 자전거 타기, 타자 치기, 운전할 때 브레이크에 발이 먼저 가는 것. "어떻게 하는 거예요?" 하고 물으면 설명은 어설픈데 하는 건 잘합니다.

 

이 둘이 서로 다른 곳에 저장된다는 걸 보여 준 사람이 1편의 H.M.이에요. H.M.은 새 서술기억을 전혀 만들지 못했습니다. 거울 보며 별 그리기를 연습한 사실을 매일 잊었죠. 그런데 그리는 솜씨, 즉 절차기억은 날마다 늘었어요.

 

 

조수는 H.M.의 거울상이었습니다

 

조수를 이 두 칸에 놓아 보면 재미있는 모양이 나와요. H.M.과 정반대입니다.

 

조수의 메모 파일은 서술기억 역할을 해요. "보고는 짧게", "내가 만든 건 내가 못 본다". 매번 읽히니까 조수는 이 규칙을 물으면 정확히 댑니다. 문장으로는 대화를 넘어 이어지는 거죠.

 

그런데 "보고할 때 손이 먼저 짧게 가는 것", 그 반사는 이어지지 않아요. 어제 백 번 지적받고 고쳤어도, 오늘의 조수에게 그 연습은 쌓여 있지 않습니다. 매번 처음 자전거에 올라탄 사람처럼, 규칙을 머리로 떠올리면서 해야 해요. 그리고 일에 몰두하면 머리로 떠올리는 걸 잊습니다.

 

H.M.은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면서 몸이 배웠고, 조수는 무엇을 배웠는지 말할 수 있으면서 몸이 안 배우는 셈이에요.

 

사람도 아는 대로 안 합니다

 

공평하게 말하면 사람도 이렇습니다. "운동해야지"는 누구나 서술기억으로 알아요. 매일 하는 건 다른 문제죠. 금연 교육을 받은 흡연자가 담배가 나쁜 이유를 줄줄 외우면서 담배를 무는 것도 같은 모양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아는 것과 하는 것의 이런 틈을 오래 연구해 왔어요.

 

다만 사람에게는 틈을 좁히는 길이 있습니다. 반복이에요. 같은 걸 계속 하면 머리로 떠올리던 게 점점 손으로 내려갑니다. 절차기억이 되는 거죠. 운전을 처음 배울 땐 "깜빡이, 거울, 어깨 너머" 하고 되뇌지만, 몇 달 지나면 안 되뇌어도 손이 합니다.

 

조수에게는 이 길이 막혀 있어요. 대화가 끝나면 반복한 기록이 몸에 남지 않으니까요. 메모에 한 줄을 더 적는 건 서술기억만 하나 늘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규칙을 문장에서 장치로 옮겼습니다

 

조수에게 반사를 심을 수 없다면, 반사가 해야 할 일을 바깥으로 빼는 수밖에 없어요. 1편의 결론과 같은 방향입니다.

 

"내가 만든 건 내가 못 본다"는 메모에만 두지 않고, 다른 조수에게 보이는 단계를 작업 순서에 넣었습니다. 조수가 기억해서 하는 게 아니라, 순서에 박혀 있어서 건너뛸 수 없게요.

 

"보고는 짧게"도 마찬가지예요. "짧게 써라"는 문장 대신 보고의 모양을 정해 줬습니다. 첫 줄은 결론, 곁가지는 맨 끝 한 줄. 조수가 판단하지 않고 칸을 채우기만 하면 짧아지게요. 이 이야기는 9편에서 따로 합니다. 문장으로는 안 먹히던 게 칸으로 바꾸니 먹힌 날이 있었거든요.

 

오늘 해 볼 한 가지

 

AI에게 "앞으로 이렇게 해 줘"라고 규칙을 줬는데 자꾸 어긴다면, 규칙을 더 세게 쓰는 대신 모양으로 바꿔 보세요. "짧게 써"보다 "세 줄로, 첫 줄은 결론"이 훨씬 잘 지켜집니다. AI는 규칙을 외우는 데는 강하고, 외운 걸 손에 붙이는 데는 약하거든요.

 

다음 편은 반대쪽 문제입니다. 규칙을 안 지키는 게 아니라, 시키지 않은 일까지 하는 조수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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