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4시간이라더니 70분이었습니다 — 조수는 잰 숫자와 옮긴 숫자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4시간 걸린다더니"
롤토체스 도구의 통계를 새로 모으던 날이었어요. 시즌이 바뀌고 한 달이 지나서, 시즌 초에 모아 둔 판 기록이 낡았거든요. 조수에게 다시 모으라고 했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판 3,000개를 다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번엔 4시간쯤 걸렸습니다."
4시간이면 오후를 통째로 비워야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그동안 할 다른 일을 골랐습니다. 집 찾기 도구 자료도 새로 받고, 카드 도구도 손보기로 하고요.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나 보니 수집이 끝나 있었습니다. 기록을 열어 보니 시작 11시 18분, 끝 12시 28분. 70분이었어요.
"4시간 걸린다더니?"
<!-- 사진 자리 ①: 수집 기록의 시작·끝 시각 -->
그 4시간은 어디서 왔나
조수에게 물었더니 답은 간단했습니다. 재 본 숫자가 아니었어요. 조수가 들고 다니는 메모에 이 도구를 두고 "네 시간짜리 수집이 그물 한 번 끊기면 죽던 것도 재시도로 고쳤다"는 문장이 있었고, 거기 나온 "네 시간"을 그대로 옮긴 거였습니다.
지난번이 왜 4시간이었는지는 메모에 없었습니다. 시즌 초라 위 등급 사람이 모자라서 아래 등급까지 한 칸씩 내려가며 찾았던 건지, 중간에 인터넷이 끊겨 다시 돌렸던 건지. 조건이 다른 날의 숫자였을 가능성이 큰데, 그 조건은 떨어져 나가고 숫자만 남아 있었어요.
재미있는 건 계산하면 바로 나오는 값이었다는 겁니다. 이 수집은 게임 회사가 정한 속도 제한에 묶여 있어요. 2분에 100번까지만 물어볼 수 있습니다. 판 3,000개에 선수 목록 조회 200번 남짓이면 3,200번쯤이고, 2분에 100번이면 64분. 실제 70분과 거의 맞아요.
계산으로 64분이 나오는 일에 옮겨 온 4시간을 댄 겁니다.
행운의 바퀴가 가리킨 숫자
심리학에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1974년 트버스키와 카너먼이 사람들 앞에서 0부터 100까지 적힌 바퀴를 돌렸어요. 바퀴는 몰래 10이나 65에서만 멈추게 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물었죠. "유엔 회원국 중 아프리카 나라의 비율은 이 숫자보다 높을까요, 낮을까요? 정확히는 몇 퍼센트일까요?"
바퀴가 10에서 멈춘 사람들이 댄 값의 중간은 25%, 65에서 멈춘 사람들은 45%였습니다. 질문과 아무 상관 없는 숫자인 걸 뻔히 보고도 처음 본 숫자 쪽으로 끌려간 거예요. 이걸 앵커링, 닻 내리기라고 부릅니다. 처음 들어온 숫자에 닻이 내려지고, 그다음 판단은 거기서 조금씩만 움직입니다.
사람의 앵커링은 보통 "조정이 모자라다"로 설명해요. 닻에서 출발해 고쳐 나가긴 하는데, 충분히 멀리 못 간다는 거죠.
<!-- 사진 자리 ②: 바퀴 실험 도식 — 10과 65, 25%와 45% -->
조수의 닻은 조정조차 없었습니다
조수 쪽을 보면 한 단계가 더 빠져 있습니다. 사람은 닻에서 출발해 그래도 조금은 움직이는데, 조수는 아예 안 움직였어요. 메모의 "네 시간"이 그대로 "4시간쯤"이 됐습니다.
그리고 사람 실험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어요. 실험 참가자들은 바퀴가 엉터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조수에게 그 메모는 엉터리 바퀴가 아니라 자기가 예전에 적어 둔 기록이에요. 믿을 만한 곳에서 온 숫자처럼 보이니 의심할 이유가 없었던 거죠.
제가 보기엔 여기가 핵심입니다. 조수에게는 "내가 쟀던 숫자"와 "어디서 읽어 온 숫자"가 똑같은 모양으로 들어 있어요. 둘 다 그냥 "4시간"입니다. 잰 날의 조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숫자에 붙어 있지 않아요.
말투는 둘 다 똑같았습니다
"지난번엔 4시간쯤 걸렸습니다"와 "한도로 계산하면 64분입니다". 두 문장이 화면에 뜨는 모양은 똑같아요. 어느 쪽도 "제가 재 본 건 아닌데요"라는 표시를 달고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4시간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 숫자를 기준으로 오후 계획을 짰어요. 다행히 이번엔 일찍 끝난 거라 손해가 없었습니다. 반대였다면 어땠을까요. 70분이면 된다고 들었는데 4시간이 걸렸다면, 기다리다 다른 일을 다 밀렸겠죠.
이 연재를 쓰면서 계속 부딪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조수가 틀리는 순간에는 틀린다는 신호가 없다는 것. 이번에도 그랬어요.
그래서 붙인 질문 하나
그날 이후로 조수가 시간이나 양을 말하면 하나를 더 묻습니다.
"잰 거예요, 옮긴 거예요?"
옮긴 거라면 다시 계산하게 합니다. 이 경우처럼 한도와 개수만 있으면 나누기 한 번으로 나오는 일이 생각보다 많아요. 조수에게 계산을 시키면 64분이 나오고, 기억을 물으면 4시간이 나옵니다. 같은 조수인데 어느 쪽을 물었느냐에 따라 답이 네 배 차이가 난 거죠.
메모 쪽도 고쳤습니다. 숫자를 적을 땐 그 숫자가 나온 조건을 같이 적게 했어요. "4시간(시즌 초, 아래 등급까지 내려가며 수집, 중간에 끊겨 재시도)" 같은 식으로요. 조건이 달라지면 숫자도 따라 바뀐다는 걸 다음번의 조수가 볼 수 있게.
오늘 해 볼 한 가지
AI가 "보통 이 정도 걸려요", "지난번엔 이만큼이었어요" 하고 숫자를 주면, 한 번만 되물어 보세요. "그거 어디서 나온 숫자예요?" 계산할 수 있는 숫자면 계산해 달라고 하고요. 처음 들은 숫자가 판단을 끌고 가는 건 사람이나 AI나 같은데, AI 쪽은 그 숫자가 어디서 왔는지 스스로 구분하지 않거든요.
다음 편에서는 이 이야기의 친척을 다룹니다. 조수가 2년 전 정보를 오늘 정보처럼 말한 날이에요. 언제 알게 된 건지 모르는 기억, 심리학에서는 출처 기억 오류라고 부르는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