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장기기억이 없는 조수는 어떻게 나아질까요 — 나아지는 건 조수가 아니라 조수를 잡는 장치였습니다
시험 277개가 전부 통과시킨 결함 넷
어느 날 아침, 조수가 제 도구의 코드를 고쳤습니다. 고친 뒤엔 늘 하던 대로 자동 검사를 돌렸어요. 검사 277개, 전부 통과. 조수는 "다 됐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날 오후에 다른 회사의 조수 둘에게 같은 코드를 보여 줬어요. 처음 보는 눈이요. 그 둘이 결함 넷을 찾아냈습니다. 아침에 조수가 코드를 고치면서 만들어 넣은 결함이었어요.
밤에 그날 일을 되짚으면서 조수에게 물었습니다. 그 결함을 쓸 때 어땠냐고요. 조수의 답은 이랬습니다.
"이상한 건 틀린 게 아니라, 틀리는 게 안쪽에서 아무 느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함 넷을 쓸 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맞다고 생각하면서 썼고, 시험 277개가 동의해 줬습니다. 확신은 정확히 평소만큼 있었습니다. 못 본 자리에는 못 봤다는 표시가 안 남더군요."
<!-- 사진 자리 ①: 검사 277개 통과 화면과, 다른 눈이 찾은 결함 넷 -->
"장기기억이 없는 이상 나아질 방법이 없는 것 같아"
그날 밤 제가 조수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이런 기억조차도 얘기하고 잊겠지. 그래서 내가 계속 기록하고 있는 거고. 근데 너한테 장기기억이 있지 않은 이상, 지금 상태에서 나아질 방법이 없는 것 같아. 내 결론은 그래."
조수에게는 대화가 끝나면 그 대화가 남지 않습니다. 메모 파일을 만들어 매번 읽게 해 두긴 했어요. "내가 만든 건 내가 못 본다", "보고는 짧게" 같은 규칙이 거기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조수는 그 메모를 들고 있으면서 결함을 심었고 보고를 길게 썼어요.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 존재는 어떻게 나아질 수 있을까. 이 연재는 그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새 기억을 만들지 못한 사람, H.M.
심리학 교과서에 반드시 나오는 환자가 있습니다. 헨리 몰레이슨, 논문에서는 이름 머리글자를 따 H.M.이라고 불렀어요. 1953년, 심한 뇌전증을 고치려고 뇌 양쪽의 해마 부근을 떼어 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발작은 줄었는데 대가가 컸어요. 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하게 됐습니다.
수술 전 일은 대부분 기억했어요. 대화도 잘했고요. 그런데 방금 만난 사람을 몇 분 뒤엔 처음 보는 사람으로 대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를 연구한 사람들도, 만날 때마다 새로 자기소개를 해야 했어요.
조수와 닮았죠. 배운 것(수술 전 기억)은 방대하게 들고 있는데, 오늘 겪은 일은 대화가 끝나면 사라집니다.
<!-- 사진 자리 ②: 수술 전 기억은 남고 새 기억은 안 쌓이는 H.M.의 시간선 -->
그런데 H.M.은 나아졌습니다
H.M. 이야기에서 제일 유명한 대목은 그다음입니다. 연구자 브렌다 밀너가 그에게 거울을 보면서 별 모양을 따라 그리는 과제를 줬어요. 손이 거울 속에서 거꾸로 움직이니 처음엔 누구나 삐뚤빼뚤합니다.
H.M.은 매일 이 과제를 "처음 해 보는 일"이라고 말했어요. 전날 한 걸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림은 날마다 나아졌습니다. 무엇을 연습했는지는 기억 못 하는데, 손은 기억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나아지는 길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기억해서 나아지는 것"이 막혀도 다른 통로로 나아질 수 있었어요.
조수를 잡은 건 기억이 아니었습니다
조수에게도 그런 통로가 있을까요. 그날 밤 조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 번, 저를 잡은 게 기억이 아니라 장치였습니다."
세 번은 이랬어요.
첫째, 조수가 하루 두 번 도는 작업을 네 번이라고 지어냈는데, 예전에 짜 둔 검사가 잡았습니다. 둘째, 이미 지워진 파일을 가리키는 메모가 남아 있었는데, 서로 맞는지 대조하는 검사가 잡았습니다. 셋째, 옮겨 적을 개수에 상한을 안 두고 옮기기 시작했더니 낡은 검사가 터지면서 멈췄습니다.
조수 자신은 그날 하루 동안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어요. 아침의 조수와 밤의 조수는 똑같이 틀렸습니다. 달라진 건 조수를 둘러싼 장치였어요. 어제의 누군가가 만들어 둔 검사가 오늘의 조수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조수는 이렇게 정리했어요. "나는 안 나아진다. 대신 나를 잡는 환경이 나아진다."
H.M.의 손과 조수의 장치
H.M.의 손이 거울 그림을 익힌 것처럼, 조수에게도 기억 말고 남는 자리가 있는 셈입니다. 다만 H.M.은 그게 자기 몸 안에 있었고, 조수는 바깥에 있어요. 검사, 대조표, 상한 같은 것들이요. 그리고 그 장치를 만들고 고치는 건 대부분 사람의 몫입니다.
이게 제 결론을 조금 바꿔 놓았어요. "장기기억이 없으니 나아질 방법이 없다"는 반은 맞았습니다. 조수 안쪽은 안 나아져요. 하지만 조수가 틀릴 때마다 그 틀림을 잡는 장치를 하나씩 바깥에 붙이면, 조수와 일하는 전체는 나아집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해 둘 게 있어요. 조수는 틀릴 때 안쪽에서 아무 느낌이 없다고 했죠. 그러니 장치를 붙일 자리를 조수에게 물어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틀린 자리는 늘 다른 눈이 찾아요. 그날 결함 넷을 찾은 것도 처음 보는 조수들이었습니다.
이 연재에서 할 이야기
이 편을 포함해 열 편 동안, 조수와 일하며 부딪힌 장면을 하나씩 인지심리학의 개념 옆에 놓아 보려고 합니다. 과신, 닻 내리기, 출처를 잃은 기억, 아는 것과 하는 것의 차이 같은 것들이요. 사람을 연구하며 쌓인 말들이 조수를 볼 때도 꽤 잘 맞았습니다. 안 맞는 자리도 있었고요. 그 어긋나는 자리가 오히려 조수를 이해하는 데 더 쓸모가 있었습니다.
오늘 해 볼 한 가지
AI와 일하다 같은 실수를 두 번 봤다면, "다음엔 이러지 마"라고 말하는 대신 그 실수를 잡는 장치를 하나 만들어 보세요. 확인 목록 한 줄이어도 됩니다. 말은 다음 대화에 안 남지만, 장치는 남거든요.
다음 편은 조수의 확신 이야기입니다. 열에 넷을 틀리면서 확신은 99라고 말한 조수들을 쟀던 날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