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75년경(추정) — 생년 불명(175년경, 계산용 가정값·표시는 '추정')
사망 244년 — 정시 5년(244) 사망, 시호 효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21년 | 계 | 상서→유주자사→하간태수→대홍려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205년 | 기타·재야 | (청하 동무성 출신, 출사 전·연대 불명) | 불명 |
| 206~213년 | 위 | 오장→기주주부·별가·승상연속 | 불명 |
| 214~220년 | 위 | 어사중승 | 불명 |
| 221년 | 위 | 상서→유주자사→하간태수→대홍려 | 기록 |
| 222~228년 | 위 | 상서→유주자사→하간태수→대홍려 | 불명 |
| 229~236년 | 위 | 광록훈·사례교위 | 불명 |
| 237~243년 | 위 | 사공(경초 연간) | 불명 |
| 244년 | 위 | (사공 재임 중 사망) | 불명 |
조조가 호관을 칠 때 장척이 가장 덕정이 있는 장리로 추천해 기주주부가 된다.
정사 최림전: 태조가 호관을 칠 때 장리 중 덕정이 가장 나은 이를 묻자 병주자사 장척이 최림을 꼽아 기주주부로 발탁되었다. 호관 정벌은 206년.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4 본 「太祖征壺關問長吏德政最者并州刺史張陟以林對於是擢為冀州主簿」
유주자사로 나가 북중랑장 오질을 찾지 않고 변경을 조용히 눌러 두어 한 해 만에 도적이 가라앉는다.
정사 최림전: 문제가 즉위하자 상서가 되었다가 유주자사로 나갔다. 호와 접한 이 주는 조용히 누르는 것이 낫다며 오질에게 인사하지 않았고 한 해에 도적이 잦아들었으나 윗사람을 섬기지 않았다 하여 하간태수로 좌천되었다. 연도는 문제 즉위 직후(221년경) 추정.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4 본 「此州與胡虜接宜鎮之以靜擾之則動其逆心」
경초 원년 맹강의 추천 뒤 사공이 되어 안양정후에 봉해진다. 삼공이 열후가 된 것은 최림이 처음이다.
정사 최림전: 경초 원년 사도·사공이 비자 맹강이 최림을 추천했고 이후 해에 사공이 되어 안양정후에 봉해졌다. 삼공이 열후에 봉해진 것은 최림이 처음이었다. 「後年」을 238년으로 읽음.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4 본 「後年遂為司空封安陽亭侯」
정시 5년에 죽고 시호는 효후다.
정사 최림전: 정시 5년(244) 사망, 시호 효후. 아들 최술이 이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4 본 「謚曰孝侯子述嗣」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0 | 유주자사로 변경을 안정으로 다스려 도적이 잦아들었다(최림전). 큰 전투 기록은 없다. |
| 무력 | 평가 불가 | 무용 기록 없음(최림전). |
| 지력 | 64 | 유소의 고과론에 반대해 간소한 제도를 지키자고 의견을 냈다(최림전). |
| 정치 | 80 | 대홍려·사례교위·사공을 지냈고 속군의 법 밖 관리들을 파면했다(최림전). |
| 매력 | 59 | 젊을 때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촌 최염이 큰 그릇으로 보았다. 정사에는 사후 시호가 효후로 남았다(최림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최림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