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생년 기록 없음
사망 231년 — 졸년 전문에 명기 없음 — 질병으로 소환되어 태중대부로 졸. 이 파일은 마지막 확실 연도 근처(231)까지 칸을 둠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196년 | 서악 | 서악장→의랑참군사 | 추정 |
| 197년 | 서악 | 서악장→의랑참군사 | 추정 |
| 198년 | 서악 | 서악장→의랑참군사 | 추정 |
| 199년 | 서악 | 서악장→의랑참군사 | 추정 |
| 200년 | 서악 | 서악장→의랑참군사 | 추정 |
| 201년 | 서악 | 서악장→의랑참군사 | 추정 |
| 202년 | 서악 | 서악장→의랑참군사 | 추정 |
| 203년 | 서악 | 서악장→의랑참군사 | 추정 |
| 204년 | 서악 | 서악장→의랑참군사 | 추정 |
| 205년 | 서악 | 서악장→의랑참군사 | 추정 |
| 206년 | 서악 | 서악장→의랑참군사 | 추정 |
| 207년 | 서악 | 서악장→의랑참군사 | 추정 |
| 216년 | 한중 | 시중→승상장사 | 추정 |
| 217년 | 한중 | 시중→승상장사 | 추정 |
| 218년 | 한중 | 시중→승상장사 | 추정 |
| 219년 | 한중 | 부마도위·한중 군사 감독 | 기록 |
| 228년 | 장안 | 대장군 군사(조진) | 추정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195년 | 후한 조정 | (영천 정릉 출신·형주로 피난) | 불명 |
| 196~207년 | 위 | 서악장→의랑참군사 | 추정 |
| 208~215년 | 위 | 승상군제주 | 불명 |
| 216~218년 | 위 | 시중→승상장사 | 추정 |
| 219년 | 위 | 부마도위·한중 군사 감독 | 기록 |
| 220~225년 | 위 | 독군량어사→독군량집법→상서 | 불명 |
| 226~227년 | 위 | 상서 | 불명 |
| 228년 | 위 | 대장군 군사(조진) | 추정 |
| 229년 | 위 | 대장군 군사(조진) | 불명 |
| 230~231년 | 위 | 대장군 군사(사마의) | 불명 |
서악장으로서 형주군 1만의 공격을 현리 50여 명과 막아 싸우다 전원이 부상하고도 돌아서지 않는다.
정사 두습전: 건안 초 서악장 두습은 백성을 농사로 돌려보내고 수비를 단단히 하게 했는데 형주가 보기 1만으로 성을 치자 임지를 지킬 사람 50여 명을 모아 서약했고 친척이 밖에서 자신을 지키려 하면 내보내도 모두 머리를 조아려 죽기를 원했다. 몸소 화살과 돌을 잡고 싸워 수백을 베었으나 아군 30여 명이 죽고 나머지 18명 모두 부상해 성이 뚫렸으나 두습은 상이 입은 이민을 이끌고 포위를 뚫었고 반역자는 없었다.
연의: 연의 66회
출전: 三國志 卷23 「襲帥傷痍吏民決圍得出死喪略盡而無反背者」
조조가 돌아간 뒤 한중 군사를 감독하며 주민을 달래 8만여 명이 낙양·업으로 옮겨 가게 한다.
정사 두습전: 조조가 한중에서 돌아가자 두습이 부마도위로 남아 한중 군사를 감독했고, 위로하고 이끌어 백성이 스스로 낙양·업으로 옮겨 간 이가 8만여 명이었다.
연의: 연의 66회
출전: 三國志 卷23 「綏懷開導百姓自樂出徙洛鄴者八萬餘口」
하후연이 유비에게 전사하자 장합·곽회와 군무를 수습해 장합을 도독으로 세워 삼군을 안정시킨다.
정사 두습전: 하후연이 유비에게 전사해 군이 원수를 잃고 장병이 얼굴빛을 잃었을 때 두습이 장합·곽회와 군무를 맡아 "권도로 장합을 도독으로 삼아 군심을 하나로 하자"고 해 삼군이 안정되었다.
연의: 연의 71회
출전: 三國志 卷23 「襲與張郃郭淮糾攝諸軍事權宜以郃爲督以一衆心三軍遂定」
허유가 조조를 모욕하자 조조가 치려 했으나 "범인을 치는 것은 용도 인도 아니다"라고 설득해 허유가 스스로 복종하게 한다.
정사 두습전: 허유가 부곡을 거느리고 조조에게 불복하며 모욕하는 말을 하자 조조가 크게 노해 치려 했고, 두습이 "전하께서 허유를 어떤 사람으로 보십니까" "범인" "범인이 어찌 비범한 사람을 알아보겠습니까. 지금 이리가 길에 있는데 여우를 먼저 치면 용도 인도 아닙니다"라고 말했고 조조가 따라 후하게 대하자 허유가 귀복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3 「方今豺狼當路而狐狸是先」 / 三國志 卷23 「遂厚撫攸攸即歸服」
제갈량이 진천으로 나오자 대장군 조진의 군사가 된다.
정사 두습전: 제갈량이 진천으로 나오자 대장군 조진이 제군을 도독해 막았고 두습이 대장군 군사가 되었으며 형 두기에게도 관내후 작위가 나눠졌다. 조진이 죽자 사마의가 이어받아 두습은 다시 군사가 되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3 「諸葛亮出秦川大將軍曹真督諸軍拒亮徙襲爲大將軍軍師」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6 | 정군산에서 하후연이 전사하자 장합·곽회와 군을 수습하고 장합을 도독으로 추대해 군심을 안정시켰다(두습전). |
| 무력 | 50 | 무용 기록은 없으나 서악장일 때 형주군 1만의 공격에 현 관리를 이끌고 맞서 결사 항전했다(두습전). |
| 지력 | 77 | 허유가 조조를 모욕했을 때 "범인을 쳐서 무슨 영예냐"고 조조를 설득해 허유가 스스로 귀복하게 했다(두습전). |
| 정치 | 76 | 한중 유독군사로서 백성을 달래 8만여 명을 낙양·업으로 옮겨 가게 했다(두습전). |
| 매력 | 70 | 장유와 시중으로 조조 곁에서 왕찬·화흡과 나란히 쓰였고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두습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두습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