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애(鄧艾) — 정사 삼국지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위출생 197년경(추정)사망 264년기록 연도 3해

생몰

출생 197년경(추정) — 생년 불명(197년경 추정, '조조가 형주를 깰 때 이주, 12세에 영천으로' 서술에서 역산).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64년 — 함희 원년(264) 정월 종회가 죽은 뒤 호송 도중 위관이 보낸 전속 등에게 면죽 서쪽에서 살해(등애전)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55년적도안서장군·가절·영 호동강교위기록
256년천수진서장군·도독 농우제군사·등후기록
263년성도정서장군 → 태위(촉 평정 공)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08~227년위(재야 — 농민, 도위학사, 도전수 초리 등 하급 직무)불명
228~239년위전농강기 → 상계리 → 사마의의 연(掾) → 상서랑불명
240~247년위상서랑·진항 이동 조사 — 농지·수로 정비 제안불명
248년위정서군사 참여 → 남안태수불명
249년위남안태수 — 곽회와 강유 방어불명
250~254년위성양태수 → 여남태수 → 연주자사·진위장군불명
255년위안서장군·가절·영 호동강교위기록
256년위진서장군·도독 농우제군사·등후기록
257~262년위정서장군불명
263년위정서장군 → 태위(촉 평정 공)기록
264년위(함거로 소환 중 피살)불명

나온 사건·전투

249년 · 남안태수 — 곽회와 강유 방어 · 방어

곽회와 함께 강유를 막은 뒤 곽회가 강을 치러 간 사이 강유의 재침을 예상해 백수 북쪽에 주둔하고, 강유가 요화를 보내 견제하며 동쪽으로 도성(洮城)을 노리는 계책을 간파해 밤새 군을 이끌고 먼저 도착해 성을 지킨다. 가평 원년.

정사 등애전: 가평 원년 정서장군 곽회와 촉 편장군 강유를 막았다. 강유가 물러나자 곽회는 서쪽으로 강을 쳤고 등애는 '적이 멀리 가지 않아 다시 돌아올 수 있으니 군을 나눠 대비하자'고 해 백수 북쪽에 주둔했다. 3일 뒤 강유가 요화를 백수 남쪽에서 등애 쪽으로 보내 영채를 쳤다. 등애는 '강유가 갑자기 돌아온다면 우리 군이 적으니 건너와야 하는데 다리를 놓지 않는다. 이는 강유가 요화로 우리를 붙들어 두고 자신이 동쪽으로 도성을 취하려는 것'이라 보고, 도성이 물 북쪽 60리라 밤에 몰래 가 먼저 성에 도착해 패하지 않았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8 본 「維今卒還吾軍人少法當來渡而不作橋此維使化持吾令不得還維必自東襲取洮城」

256년 · 진서장군·도독 농우제군사·등후 · 대승

강유가 기산으로 오다 등애의 대비를 알고 동정에서 남안으로 돌아 무성산 쟁탈전을 벌이다 밤에 위수를 건너 상규로 향하자, 단곡에서 크게 격파한다. 감로 원년 진서장군·도독 농우제군사·등후가 된다.

정사 등애전: 강유가 과연 기산으로 향했으나 등애가 이미 대비한 것을 알고 동정을 따라 남안으로 돌았다. 등애는 무성산을 점거해 맞섰고 강유가 요충 다툼에서 이기지 못했다. 그날 밤 위수를 건너 동쪽으로 가 산을 따라 상규로 향하자 등애가 단곡에서 싸워 크게 깨뜨렸다. 감로 원년 조서로 등애를 진서장군·도독 농우제군사에 임명하고 등후로 진봉했다.

연의: 연의 111회 — 연의 111~112회가 단곡 전투를 다룬다.

출전: 三國志 卷28 본 「維果向祁山聞艾已有備乃回從董亭趣南安艾據武城山以相持維與艾爭險不克其夜渡渭東行緣山趣上邽艾與戰於段谷大破之」

263년 · 정서장군 → 태위(촉 평정 공) · 기습

종회가 검각에서 막히자 음평에서 샛길로 한덕양정을 지나 부(涪)로 나오자고 상주하고, 10월 음평도의 무인 지대 700여 리를 산을 뚫고 다리를 놓아 지나 강유에 이른다. 군량 수송이 끊기고 절벽 아래로 담요를 두르고 구르는 위기를 넘긴다.

정사 등애전: 등애가 상주해 '지금 적이 꺾였으니 음평에서 샛길로 한덕양정을 지나 부에 이르면 검각 서쪽 100리, 성도에서 300여 리라 기병이 복심을 찌를 수 있다'고 했다. 10월 등애는 음평도로 무인 지대 700여 리를 행군하며 산을 뚫어 길을 내고 다리와 잔도를 놓았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몹시 험했고 군량 수송도 끊기려 위태로웠다. 등애는 담요로 몸을 감싸고 굴러 내려갔고 장수와 병사는 나무를 붙들고 절벽을 올라 물고기 꿰듯 나아갔다.

연의: 연의 117회

관련: 면죽 전투와 촉한의 항복

출전: 三國志 卷28 본 「冬十月艾自陰平道行無人之地七百餘里鑿山通道造作橋閣山高谷深至為艱險又糧運將匱頻於危殆艾以氈自裹推轉而下」

263년 · 정서장군 → 태위(촉 평정 공) · 대승

선봉이 강유에 이르러 촉 수장 마막이 항복하고, 제갈첨이 면죽에서 진을 치자 등충·사찬이 밀려도 등애가 호령해 다시 싸우게 하여 제갈첨과 장준 등의 목을 베고 낙성에 이른다.

정사 등애전: 선봉이 강유에 이르자 촉 수장 마막이 항복했다. 촉 위장군 제갈첨이 부에서 면죽으로 돌아와 진을 치고 등애를 기다렸다. 등애는 아들 등충 등은 오른쪽, 사찬 등은 왼쪽으로 보냈으나 둘이 싸워 불리해 물러나 '적을 칠 수 없다'고 하자 등애가 '존망이 이 한 번에 달렸는데 어찌 안 된다 하는가' 하고 베려 했다. 등충과 사찬이 달려가 다시 싸워 크게 이기고 제갈첨과 상서 장준 등을 베었다. 낙까지 진군하자 유선이 새수를 올려 항복을 청했다.

연의: 연의 117회

관련: 면죽 전투와 촉한의 항복

출전: 三國志 卷28 본 「先登至江由蜀守將馬邈降蜀衛將軍諸葛瞻自涪還綿竹列陳待艾」

263년 · 정서장군 → 태위(촉 평정 공) · 항복 수용

성도에서 유선이 태자·제왕·군신 60여 명과 면박·여친으로 군문에 나아오자 절(節)로 묶음을 풀고 관을 태우며 받아들여 용서한다. 유선에게 행표기장군을 제수하는 등 전례에 따라 임시로 임명하나 이것이 훗날 반역 혐의의 빌미가 된다.

정사 등애전: 등애가 성도에 이르자 유선이 태자·제왕과 군신 60여 명을 이끌고 면박·여친으로 군문에 나아왔고, 등애는 절을 쥐고 결박을 풀고 관을 태워 받아들이고 용서했다. 장병을 단속해 약탈이 없고 항복한 이들을 편안히 하여 옛 업에 복귀시켜 촉 사람이 칭찬했다. 등우의 고사를 따라 제서로 유선을 행표기장군, 태자를 봉거도위, 제왕을 부마도위로 삼았다.

연의: 연의 118회

관련: 면죽 전투와 촉한의 항복

출전: 三國志 卷28 본 「艾至成都禪率太子諸王及群臣六十餘人面縛輿櫬詣軍門艾執節解縛焚櫬受而宥之」

264년 · (함거로 소환 중 피살) · 사망

종회·호열·사찬이 등애가 반역을 꾀한다고 고해 함거로 소환되고, 종회가 죽은 뒤 등애의 본영 장병이 함거를 빼앗아 맞으나 위관이 보낸 전속이 면죽 서쪽에서 등애와 아들 등충을 베고 나머지 가족은 서역으로 유배된다.

정사 등애전: 종회·호열·사찬 등이 등애가 반역을 꾸몄다고 고했고 조서로 함거에 실어 불렀다. 종회가 성도에 이르러 먼저 등애를 압송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 종회가 죽은 뒤 등애 본영 장병이 함거를 쫓아와 등애를 되찾으려 하자 위관이 전속 등을 보내 등애를 토벌했고 면죽 서쪽에서 만나 베었다. 아들 등충도 함께 죽었고 낙양에 있던 다른 아들은 모두 죽었으며 아내와 손자는 서역으로 옮겨졌다.

연의: 연의 119회

출전: 三國志 卷28 본 「瓘遣田續等討艾遇於綿竹西斬之」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91음평의 무인 지대 700여 리를 뚫어 강유·마막에서 제갈첨을 깨고 성도에 이르러 유선의 항복을 받았다(등애전).
무력76아들 등충·사찬이 밀리자 목을 벨 듯 호령해 다시 싸우게 해 제갈첨 등을 베었다(등애전).
지력92'앞서 군량을 쌓고 수로를 열어 오를 친다'는 진·항 이동 둔전책과 강유의 재출병 예측을 정확히 맞힌 군략가였다(등애전).
정치80황무지 개간과 농업 우선책(濟河論)으로 가는 곳마다 군민이 풍족했다(등애전).
매력61공을 자랑해 촉 선비들에게 '나를 만나 지금이 있다' 했다가 비웃음을 샀다(등애전). 성격이 강급하고 동료와 어울리지 못했다(단작 상소).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등애의 이동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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