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66년경(추정) — 생년 불명(166년경 추정, 오에서 '58세 이전은 부모의 나이'라 한 말에서 역산).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30년 — 건흥 8년(230) 졸(장예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14년 | 성도 | 유장의 사자로 선주에게 가 성도 성문을 열게 함 → 파군태수 | 기록 |
| 215년 | 성도 | 파군태수 → 사금중랑장 | 추정 |
| 216년 | 성도 | 파군태수 → 사금중랑장 | 추정 |
| 217년 | 성도 | 파군태수 → 사금중랑장 | 추정 |
| 218년 | 성도 | 파군태수 → 사금중랑장 | 추정 |
| 219년 | 성도 | 파군태수 → 사금중랑장 | 추정 |
| 220년 | 성도 | 파군태수 → 사금중랑장 | 추정 |
| 221년 | 성도 | 파군태수 → 사금중랑장 | 추정 |
| 222년 | 성도 | 파군태수 → 사금중랑장 | 추정 |
| 223년 | 남중 | 익주태수 — 옹개에게 잡혀 오로 보내짐 | 기록 |
| 224년 | 백제성 | (오에서 석방되어 영안으로) | 기록 |
| 225년 | 성도 | 참군 겸 익주치중종사 | 기록 |
| 226년 | 성도 | 참군 겸 익주치중종사 | 기록 |
| 227년 | 성도 | 사성교위 영 유부장사 | 기록 |
| 228년 | 성도 | 사성교위 영 유부장사 | 기록 |
| 229년 | 성도 | 사성교위 영 유부장사 | 기록 |
| 230년 | 성도 | 보한장군·영 장사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0~210년 | 유장·익주 | 효렴 → 어복장 → 종사·장하사마 | 불명 |
| 211~213년 | 유장·익주 | 장하사마 — 덕양에서 장비를 막다 패배 | 불명 |
| 214년 | 촉한 | 유장의 사자로 선주에게 가 성도 성문을 열게 함 → 파군태수 | 기록 |
| 215~222년 | 촉한 | 파군태수 → 사금중랑장 | 추정 |
| 223년 | 촉한 | 익주태수 — 옹개에게 잡혀 오로 보내짐 | 기록 |
| 224년 | 촉한 | (오에서 석방되어 영안으로) | 기록 |
| 225~226년 | 촉한 | 참군 겸 익주치중종사 | 기록 |
| 227~229년 | 촉한 | 사성교위 영 유부장사 | 기록 |
| 230년 | 촉한 | 보한장군·영 장사 | 기록 |
선주가 성도를 포위하자 유장의 사자로 가서, 선주가 군주를 예우하고 백성을 안정시키겠다 약속한 뒤 돌아와 성문을 연다. 선주가 파군태수로 삼는다.
정사 장예전: 유장 때 효렴으로 어복장, 이어 종사·장하사마를 맡았다. 장비가 형주에서 점강을 따라 들어오자 유장은 장예에게 군을 주어 덕양 맥하에서 막게 했으나 패해 성도로 돌아왔다. 유장의 사자로 선주에게 갔고, 선주가 그 군주를 예우하고 백성을 안정시키겠다고 허락해 장예가 돌아오자 성문이 열렸다. 선주는 장예를 파군태수로 삼았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관련: 유비, 익주를 얻다
출전: 三國志 卷41 본 「為璋奉使詣先主先主許以禮其君而安其人也裔還城門乃開」
익주태수로 부임했으나 옹개가 귀신의 가르침이라 칭하며 '장부군은 박 같다'고 하여 묶어 오로 보낸다. 오에서 몇 해 숨어 지내다 손권에게 인견되고, 손권의 시험을 재치로 넘긴 뒤 서둘러 달아나 영안 경계에 든다.
정사 장예전: 익주군이 태수 정앙을 죽이자 옹개의 은신이 남토에 뚜렷해 장예를 익주태수로 삼아 부임시켰다. 옹개는 머뭇거리며 복종하지 않고 귀신의 가르침이라며 '장부군은 박 같아 겉은 윤이 나나 속은 거칠고 죽일 만하지 않으니 묶어 오에 보내라' 하여 장예를 손권에게 보냈다. 선주가 죽은 뒤 제갈량이 등지를 오에 보내 장예를 청하게 하자 손권이 허락했다. 장예가 손권을 인견하고 돌아와 서둘러 길을 가 영안 경내에 든 뒤에야 쫓던 사람이 미치지 못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1 본 「闓遂趑趄不賓假鬼教曰張府君如瓠壺外雖澤而內實粗不足殺令縛與吳於是遂送裔於權」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자 사성교위로서 유부장사를 겸해 후방을 맡는다. 이듬해 한중으로 찾아가 자문한다.
정사 장예전: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자 장예는 사성교위로 유부장사를 겸했다. '공로는 먼 곳도 빠뜨리지 않고 벌은 가까운 이를 편들지 않으며 작위는 공 없이 받을 수 없고 형벌은 귀한 세력으로 면할 수 없다'며 제갈량의 공정을 칭송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1 본 「亮出駐漢中裔以射聲校尉領留府長史」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1 | 덕양 맥하에서 유장의 군을 이끌고 장비를 막다 패했다(장예전). |
| 무력 | 평가 불가 | 무용 기록 없음. |
| 지력 | 71 | 오에서 손권의 시험을 재치로 넘기고 몰래 도망쳐 영안으로 돌아왔다(장예전). |
| 정치 | 72 | 사금중랑장으로 농기·전쟁 기구를 만들고, 승상 참군으로 부서 일을 맡아 유부장사 업무를 봤다(장예전). |
| 매력 | 68 | '공로는 먼 곳이라도 빠뜨리지 않고 벌은 가까워도 편들지 않는다'며 제갈량의 공정함을 칭송했다(장예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장예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