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예(宗預) — 정사 삼국지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촉한출생 185년경(추정)사망 264년기록 연도 19해

생몰

출생 185년경(추정) — 생년 불명(185년경 추정).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64년 — 함희 원년(264) 봄 낙양으로 이주하던 길에 병사(종예전)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23년한중주부 → 참군·우중랑장추정
224년한중주부 → 참군·우중랑장추정
225년한중주부 → 참군·우중랑장추정
226년한중주부 → 참군·우중랑장추정
227년한중주부 → 참군·우중랑장추정
228년한중주부 → 참군·우중랑장추정
229년한중주부 → 참군·우중랑장추정
230년한중주부 → 참군·우중랑장추정
231년한중주부 → 참군·우중랑장추정
232년한중주부 → 참군·우중랑장추정
233년한중주부 → 참군·우중랑장추정
234년무창참군·우중랑장 — 제갈량 사후 오에 사자기록
235년성도시중 → 상서추정
236년성도시중 → 상서추정
237년성도시중 → 상서추정
238년성도시중 → 상서추정
239년성도시중 → 상서추정
240년성도시중 → 상서추정
241년성도시중 → 상서추정
242년성도시중 → 상서추정
243년성도시중 → 상서추정
244년성도시중 → 상서추정
245년성도시중 → 상서추정
246년성도시중 → 상서추정
247년성도둔기교위 → 후장군기록
248년성도둔기교위 → 후장군기록
249년성도둔기교위 → 후장군기록
250년성도둔기교위 → 후장군기록
251년백제성후장군·독영안 → 정서대장군기록
252년백제성후장군·독영안 → 정서대장군기록
253년백제성후장군·독영안 → 정서대장군기록
254년백제성후장군·독영안 → 정서대장군기록
255년백제성후장군·독영안 → 정서대장군기록
256년백제성후장군·독영안 → 정서대장군기록
257년백제성후장군·독영안 → 정서대장군기록
258년성도진군대장군·영 연주자사기록
259년성도진군대장군·영 연주자사기록
260년성도진군대장군·영 연주자사기록
261년성도진군대장군·영 연주자사기록
262년성도진군대장군·영 연주자사기록
263년성도진군대장군기록
264년낙양(낙양으로 이주 중 병사)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14~222년촉한(장비를 따라 입촉)불명
223~233년촉한주부 → 참군·우중랑장추정
234년촉한참군·우중랑장 — 제갈량 사후 오에 사자기록
235~246년촉한시중 → 상서추정
247~250년촉한둔기교위 → 후장군기록
251~257년촉한후장군·독영안 → 정서대장군기록
258~262년촉한진군대장군·영 연주자사기록
263년촉한진군대장군기록
264년위(낙양으로 이주 중 병사)기록

나온 사건·전투

234년 · 참군·우중랑장 — 제갈량 사후 오에 사자 · 외교

제갈량이 죽자 오가 파구 수비를 1만 명 늘리고 촉도 영안 수비를 늘린다. 종예가 사자로 가니 손권이 '동서는 한 집인데 서쪽이 백제 수비를 늘린 이유가 무엇이오' 묻고, 종예는 '동이 파구 수비를 늘린 것과 서가 백제 수비를 늘린 것은 형세상 마땅하여 서로 따질 일이 아니다'라 대답하자 손권이 크게 웃으며 강직을 칭찬한다.

정사 종예전: 제갈량이 죽자 오는 위가 쇠한 틈에 촉을 취할까 염려해 파구 수비병을 1만 명 늘렸다. 한편으로 구원, 한편으로 일을 나누려는 뜻이었다. 촉도 영안 수비를 늘려 비상에 대비했다. 종예가 명을 받아 오에 사자로 가자 손권이 '동과 서는 한 집과 같은데 서쪽이 백제 수비를 늘린 까닭이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종예는 '신이 생각하기에 동이 파구 수비를 늘리고 서가 백제 수비를 늘린 것은 모두 형세로 마땅한 일이니 서로 따질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손권이 크게 웃으며 그 강직을 가상히 여기고 매우 아꼈다.

연의: 연의 105회

출전: 三國志 卷45 본 「東之與西譬猶一家而聞西更增白帝之守何也預對曰臣以為東益巴丘之戍西增白帝之守皆事勢宜然俱不足以相問也」

264년 · (낙양으로 이주 중 병사) · 사망

촉이 망한 뒤 진서(함희 원년) 봄 노년의 종예는 廖化와 함께 낙양으로 이주하다가 도중에 병으로 죽는다.

정사 종예전·요화전: 경요 원년 질병으로 성도로 소환되어 뒤에 진군대장군·영 연주자사가 되었다. 함희 원년(264) 봄 요화와 종예는 함께 낙양으로 이주하던 길에 병으로 죽었다. 앞서 제갈첨이 처음 조정을 맡았을 때 요화가 함께 가자고 하자 종예가 '우리는 일흔을 넘겼으니 죽는 일만 남았는데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구해 문을 두드리겠는가' 하며 가지 않았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5 본 「化預俱內徙洛陽道病卒」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61영안 도독으로 오와의 접경을 맡았다(종예전).
무력평가 불가무용 기록 없음.
지력71손권이 '서쪽이 백제 수비를 늘린 까닭'을 묻자 '동에서 파구를 늘린 것과 같은 이치'라 응수해 '강직함을 아낀다'는 평을 얻었다(종예전).
정치68시중·상서를 지냈다(종예전).
매력76손권이 눈물로 이별하며 '그대는 두 나라 우호를 맺어 왔는데 서로 다시 못 볼까 걱정'이라 했다(종예전).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종예의 이동 경로

촉한 소속 다른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