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85년경(추정) — 생년 불명(185년경 추정).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51년 — 연희 14년(251) 졸(여예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28년 | 한중 | 파서태수 → 한중태수 겸 독농 | 기록 |
| 229년 | 한중 | 파서태수 → 한중태수 겸 독농 | 기록 |
| 230년 | 한중 | 파서태수 → 한중태수 겸 독농 | 기록 |
| 231년 | 한중 | 파서태수 → 한중태수 겸 독농 | 기록 |
| 232년 | 한중 | 파서태수 → 한중태수 겸 독농 | 기록 |
| 233년 | 한중 | 파서태수 → 한중태수 겸 독농 | 기록 |
| 238년 | 성도 | 촉군태수 | 추정 |
| 239년 | 성도 | 촉군태수 | 추정 |
| 240년 | 성도 | 촉군태수 | 기록 |
| 241년 | 성도 | 촉군태수 | 추정 |
| 242년 | 성도 | 촉군태수 | 추정 |
| 243년 | 성도 | 촉군태수 | 추정 |
| 244년 | 성도 | 촉군태수 | 추정 |
| 245년 | 성도 | 촉군태수 | 추정 |
| 246년 | 성도 | 상서 → 상서령 | 기록 |
| 247년 | 성도 | 상서 → 상서령 | 기록 |
| 248년 | 성도 | 상서 → 상서령 | 기록 |
| 249년 | 성도 | 상서 → 상서령 | 기록 |
| 250년 | 성도 | 상서 → 상서령 | 기록 |
| 251년 | 성도 | 상서령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14~218년 | 촉한 | 염부 전조도위 → 신도·면죽령 | 불명 |
| 219~222년 | 촉한 | 면죽령 | 불명 |
| 223~227년 | 촉한 | 파서태수 | 불명 |
| 228~233년 | 촉한 | 파서태수 → 한중태수 겸 독농 | 기록 |
| 234~237년 | 촉한 | 광한태수 | 불명 |
| 238~239년 | 촉한 | 촉군태수 | 추정 |
| 240년 | 촉한 | 촉군태수 | 기록 |
| 241~245년 | 촉한 | 촉군태수 | 추정 |
| 246~250년 | 촉한 | 상서 → 상서령 | 기록 |
| 251년 | 촉한 | 상서령 | 기록 |
제갈량이 해마다 출군하며 군마다 징발할 때 파서태수 여예가 병사 5천을 모아 제갈량에게 보내고 달래어 통제해 도망자가 없었다. 연도는 건흥 연간으로 추정.
정사 여예전: 제갈량이 해마다 군을 일으켜 여러 군에서 징발했으나 서로 돕지 않는 일이 많았다. 여예는 병사 5천을 모집해 제갈량에게 보냈고, 달래고 단속하여 도망치는 이가 없었다. 이어 한중태수로 옮겨 독농을 겸하며 군량을 이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39 본 「乂募取兵五千人詣亮慰喻檢制無逃竄者徙為漢中太守兼領督農供繼軍糧」
제갈량 사후 촉군태수로서 호적에서 빠진 사졸과 도망자를 단속해 몇 해 사이 1만여 명이 스스로 호적에 올랐다. 연도는 본문에 없어 추정.
정사 여예전: 제갈량이 죽은 뒤 촉군에는 사졸 도망자가 서로 이름을 겹쳐 쓰는 간교가 많았다. 여예가 부임해 방금하고 설득해, 몇 해 동안 스스로 나와 호적에 오른 이가 1만여 명이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39 본 「乂到官為之防禁開喻勸導數年之中漏脫自出者萬馀口」
입조하여 상서가 되고 동윤의 뒤를 이어 상서령이 된다. 청렴·간략하다는 평을 받았으나 법 집행이 각박했다. 연희 14년(251)에 죽는다.
정사 여예전: 뒤에 조정에 들어와 상서가 되고 동윤을 이어 상서령이 되었다. 일이 지체되지 않고 문 앞에 손님이 머물지 않았다. 몸가짐이 검약하고 말이 적었으며 정치가 간략해 '청능'이라 불렸으나, 법 집행이 각박하고 문서 처리 아전을 즐겨 써 큰 관직에서는 명성이 군현에서보다 깎였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39 본 「後入為尚書代董允為尚書令眾事無留門無停賓」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0 | 파서태수 때 5천 병을 모아 제갈량에게 보냈고 도망자가 없었다(여예전). |
| 무력 | 평가 불가 | 무용 기록 없음. |
| 지력 | 65 | 촉군에서 호적에서 빠진 인구 1만여 명을 찾아냈다(여예전). |
| 정치 | 85 | 신도·면죽령 때 '한 주의 모든 성 가운데 으뜸'이라 칭송받고, 한중태수로 독농을 겸해 군량을 이었다(여예전). |
| 매력 | 52 | 겸허하고 말수가 적었으나 법 집행이 각박해 '청렴하고 유능하나 명성은 군현보다 깎였다'(여예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여예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