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습(梁習) — 정사 삼국지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위출생 생년 불명사망 230년기록 연도 3해

생몰

출생 생년 불명 — 생년 기록 없음

사망 230년 — 태화 4년(230) — 졸 (전문은 「四年薨」, 태화 연호)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06년태원병주자사(별부사마 겸임)추정
207년태원병주자사(별부사마 겸임)추정
208년태원병주자사(별부사마 겸임)추정
209년태원병주자사(별부사마 겸임)추정
210년태원병주자사(별부사마 겸임)추정
211년태원병주자사(별부사마 겸임)추정
212년태원병주자사(별부사마 겸임)추정
213년업의랑·서부도독종사(기주 통속)기록
220년태원병주자사·신문정후기록
221년태원병주자사·신문정후추정
222년태원병주자사·신문정후추정
223년태원병주자사·신문정후추정
224년태원병주자사·신문정후추정
225년태원병주자사·신문정후추정
226년태원병주자사·신문정후추정
227년태원병주자사·신문정후추정
228년낙양대사농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184~205년후한 조정군강기·사공 연 → 장장→승씨·해서·하비령불명
206~212년위병주자사(별부사마 겸임)추정
213년위의랑·서부도독종사(기주 통속)기록
214~219년위의랑·서부도독종사(기주 통속)불명
220년위병주자사·신문정후기록
221~227년위병주자사·신문정후추정
228년위대사농기록
229~230년위대사농불명

나온 사건·전투

206년 · 병주자사(별부사마 겸임)

고간이 무너진 병주를 맡아 호우를 유도해 천거하고 장정을 의종으로 삼아 호·적을 안정시킨다.

정사 양습전: 병주를 맡은 양습은 고간의 난 뒤 호·적이 경내에 있고 토호가 발호하는 상황에서 호우를 예로 불러 막부로 보냈고, 뒤에 장정을 의종으로 삼았으며 이병이 떠난 뒤 가족을 옮겨 몇만 명을 업으로 보냈다. 거역하는 자는 토벌해 천 단위로 베었고 항복한 자는 만 단위였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5 「習到官诱谕招纳皆礼召其豪右稍稍荐舉使詣幕府」 / 三國志 卷15 「邊境肅清百姓布野勤勸农桑令行禁止」

213년 · 의랑·서부도독종사(기주 통속)

병주가 기주에 합쳐지자 서부도독종사로 기주를 통솔하고 둔전도위를 둔다.

정사 양습전: 건안 18년 병주가 기주에 합쳐지자 양습은 의랑·서부도독종사가 되어 기주를 통속하고 옛 부곡을 총괄했으며, 둔전 도위 2인을 두고 객 600부를 거느리게 해 길가에 콩·조를 심어 인우의 비용을 대게 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5 「習表置屯田都尉二人领客六百夫於道次耕种菽粟以给人牛之费」

220년 · 병주자사·신문정후

문제가 즉위해 병주를 다시 두자 다시 병주자사가 되고 정치가 늘 천하에서 으뜸이었다.

정사 양습전: 문제가 즉위하자 병주를 다시 두어 양습을 병주자사로 삼고 신문정후로 올렸으며 그 정치는 늘 천하에서 으뜸이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5 「文帝践阼復置并州復爲刺史進封申門亭侯」

228년 · 대사농

병주에서 20여 년 일했으나 가난하게 살아 명제가 특이히 여겨 예우한다.

정사 양습전: 태화 2년 대사농에 임명되었고 양습은 병주에서 20여 년 일했으나 가난하고 진귀한 물건이 없어 명제가 특이히 여겨 예와 하사를 후히 했으며 태화 4년에 졸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5 「習在州二十餘年而居處贫窮無方面珍物明帝異之礼赐甚厚」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60병주 20여 년 동안 호·적을 달래 변경을 평정하고 단우를 입시하게 했다(양습전).
무력평가 불가무용 기록은 없다.
지력69병주에서 호우를 먼저 불러 천거하고 장정을 뽑아 의종으로 삼아 반란 세력을 꺾었다(양습전).
정치86병주 둔전 도위를 두고 객 600부를 두어 곡식을 심게 했고 문제 때도 정치는 늘 천하 으뜸이었다(양습전).
매력70재물 없이 가난하게 살아 명제가 이를 특이히 여겼다(양습전).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양습의 이동 경로

위 소속 다른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