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65년경(추정) — 생년 불명(165년경, 계산용 가정값·표시는 '추정')
사망 213년 — 사망 연도 불명. 마지막 기록이 건안 18년(213) 위공 추대 연명에 이름이 오른 것이라 그 해까지만 표시한다.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199년 | 환성 | 여강태수→조조에게 귀의 | 기록 |
| 213년 | 업 | 평로장군·화향후(위공 추대 연명)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198년 | 기타·재야 | (원술의 옛 관리)·여강태수(원술 임명) | 불명 |
| 199년 | 기타·재야 | 여강태수→조조에게 귀의 | 기록 |
| 200~212년 | 위 | 열후·평로장군 | 불명 |
| 213년 | 위 | 평로장군·화향후(위공 추대 연명) | 기록 |
원술이 죽자 장사 양홍·대장 장훈의 무리가 손책에게 가려는 것을 요격해 모두 잡고 진보를 거두어 간다.
정사 손책전: 원술이 죽자 장사 양홍·대장 장훈 등이 무리를 이끌고 손책에게 가려 했으나 여강태수 유훈이 요격해 모두 사로잡고 진보를 거두어 돌아갔다. 원술 사망은 건안 4년(199).
연의: 연의 해당 없음
관련: 환성·사선 전투
출전: 三國志 卷46 본 「後術死長史楊弘大將張勳等將其衆欲就策廬江太守劉勳要擊悉虜之收其珍寶以歸」
손책이 거짓 맹약으로 상료 공격을 권하자 유훈이 나간 사이 손책이 여강을 밤낮으로 쳐서 취하고 유훈은 조조에게 달아난다.
정사 손책전: 손책이 유훈과 거짓으로 화맹하고 유훈이 새로 원술의 무리를 얻은 터에 예장 상료의 종민 1만 가가 강동에 있으니 치라고 권했다. 유훈이 나간 뒤 손책이 가벼운 군으로 밤낮 달려 여강을 쳐 빼앗았고 유훈의 무리는 모두 항복해 유훈은 수백 명과 조조에게 갔다. 이후 손책이 유훈을 심양에서 쳤다(손권전·주유전). 건안 4년(199).
연의: 연의 29회
관련: 환성·사선 전투
출전: 三國志 卷46 본 「策聞之僞與勳好盟勳新得術衆時豫章上繚宗民萬餘家在江東策勸勳攻取之勳旣行策輕軍晨夜襲拔廬江勳衆盡降」
여강태수 유훈이 무리를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해 열후가 된다.
정사 무제기: 건안 4년 여강태수 유훈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 열후에 봉해졌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관련: 환성·사선 전투
출전: 三國志 卷01 본 「廬江太守劉勳率衆降封爲列侯」
위공 구석을 권하는 연명에 평로장군 화향후로 이름이 오른다.
정사 무제기 주: 위공 구석을 권하는 중군사 왕릉·순유·종요·양무·모개·평로장군 화향후 유훈 등이 연명했다. 위공 추대는 건안 18년(213).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01 주 「平虜將軍華鄉侯劉勳」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5 | 원술 사후 그 무리를 요격해 사로잡았으나 손책의 기습으로 여강을 잃었다(손책전). |
| 무력 | 평가 불가 | 무용 기록 없음. |
| 지력 | 50 | 손책의 거짓 맹약에 속아 상료를 치러 나간 사이 본거지를 잃었다(손책전). |
| 정치 | 50 | 원술의 옛 관리로 여강태수가 되었다(손책전). |
| 매력 | 50 | 조조에게 항복해 열후가 되었고 평로장군·화향후에 이르렀다(무제기).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유훈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