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생년 불명(정사에 나이 기록 없음).
사망 255년 — 정원 2년(255), 사마사에 반란했다가 패해 신현 근처에서 안풍진 도위 부민에게 화살로 죽고 수급이 낙양으로 보내짐(관구검전). 삼족이 멸해졌다.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37년 | 양평(襄平) | 유주자사(요수에서 공손연과 싸움) | 기록 |
| 238년 | 양평(襄平) | (사마의와 요동 평정) | 기록 |
| 244년 | 환도 | 도료장군(고구려 정벌) | 기록 |
| 245년 | 환도 | 도료장군(고구려 정벌) | 기록 |
| 252년 | 수춘 | 진동장군·양주 도독(합비 신성) | 기록 |
| 253년 | 수춘 | 진동장군·양주 도독(합비 신성) | 기록 |
| 254년 | 수춘 | 진동장군 | 추정 |
| 255년 | 수춘 | (수춘에서 반란, 패사)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226년 | 위 | (하동 문희 출신, 평원후 문학 등 연대 불명) | 불명 |
| 227~232년 | 위 | 상서랑·우림감·낙양 전농·형주자사 | 불명 |
| 233~236년 | 위 | 유주자사·도료장군(요동 정벌 준비) | 불명 |
| 237년 | 위 | 유주자사(요수에서 공손연과 싸움) | 기록 |
| 238년 | 위 | (사마의와 요동 평정) | 기록 |
| 239~243년 | 위 | 유주자사 | 불명 |
| 244~245년 | 위 | 도료장군(고구려 정벌) | 기록 |
| 246~251년 | 위 | 좌장군 → 예주자사 → 진남장군 | 불명 |
| 252~253년 | 위 | 진동장군·양주 도독(합비 신성) | 기록 |
| 254년 | 위 | 진동장군 | 추정 |
| 255년 | 위 | (수춘에서 반란, 패사) | 기록 |
유주 군을 이끌고 양평에 이르러 요수에 주둔하며 오환을 항복시키고, 공손연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돌아온다.
정사 관구검전: 청룡 중 유주자사·도료장군이 되어 양평에 이르러 요수에 주둔했다. 오환 선우 등이 항복했다. 공손연이 맞서 싸워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연도는 명제기의 경초 원년(237) 서술에 맞춘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8 「率幽州諸軍至襄平,屯遼隧」 / 三國志 卷28 「公孫淵逆與儉戰,不利,引還」
이듬해 사마의와 함께 공손연을 쳐 요동을 평정한다.
정사 관구검전: 이듬해 명제가 사마선왕에게 중군과 관구검 등 수만을 거느리게 해 공손연을 쳐 요동을 평정했고, 관구검이 공으로 안읍후가 되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8 「儉以功進封安邑侯,食邑三千九百戶」
고구려가 자주 배반하자 보병·기병 1만을 이끌고 현도에서 나와 비류수에서 고구려 왕 궁을 쳐부수고 환도를 도륙한다.
정사 관구검전: 정시 중 보병·기병 만 명으로 현도에서 출발했고 고구려 왕 궁이 2만 명으로 비류수에서 맞섰으나 양구 전투에서 연이어 패해 달아났다. 관구검은 말을 묶고 수레를 매달아 환도에 올라 고구려의 도읍을 도륙했다. 연도는 정사에 없어 정시 5년(244)로 추정.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8 「宮連破走」 / 三國志 卷28 「儉遂束馬縣車,以登丸都,屠句驪所都」
이듬해 다시 쳐 고구려 왕이 매구로 달아나자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천 리 넘게 추격해 숙신 남쪽에 이르러 공적을 돌에 새긴다.
정사 관구검전: 6년 다시 정벌하자 궁은 매구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왕기를 시켜 옥저를 지나 천여 리를 추격해 숙신씨 남쪽 경계에서 돌에 공을 새겼고 환도산과 불내성에 새겼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8 「遣玄菟太守王頎追之,過沃沮千有餘里,至肅慎氏南界,刻石紀功,刊丸都之山,銘不耐之城」
제갈각이 합비 신성을 포위하자 문흠과 함께 막는다.
정사 관구검전: 오의 태부 제갈각이 합비 신성을 포위하자 관구검이 문흠과 함께 막았고 사마부가 중군을 이끌고 동쪽에서 포위를 풀었다. 제갈각이 물러났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8 「吳太傅諸葛恪圍合肥新城,儉與文欽御之」
문흠과 함께 태후 조서를 가칭해 사마사를 규탄하고 수춘에서 거병한다. 사마사의 지구전에 갇혀 무너지고, 신현 부근에서 화살에 맞아 죽는다.
정사 관구검전: 정원 2년 정월 혜성이 나타나자 관구검과 문흠은 길조로 여겨 태후의 조서를 가칭해 사마사를 죄주고 거병했다. 사마사가 성벽을 굳게 지키며 싸우지 않게 하고 등애가 낙가에서 유인하자 문흠이 패했다. 관구검은 밤에 달아나 무리가 무너졌고 신현에 이르러 안풍진 도위 부민 장속에게 화살로 죽었다.
연의: 연의 109회 — 연의 109회가 관구검·문흠의 반란을 극화한다.
출전: 三國志 卷28 「遂矯太后詔,罪狀大將軍司馬景王,移諸郡國,舉兵反」 / 三國志 卷28 「安風津都尉部民張屬就射殺儉,傳首京都」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80 | 유주 군을 거느려 공손연을 쳤고, 고구려 환도를 두 차례 쳐 점령했다. 마지막 반란 때는 포위 속에 문흠과 어긋나 5~6만 병력이 곧 무너졌다(관구검전). |
| 무력 | 70 | 고구려 환도 성 공략과 옥저 천 리 추격 등 직접 지휘 기록이 있다(관구검전). |
| 지력 | 71 | 공손연 정벌·고구려 정벌에 성과가 있었으나 반란 때는 사마사의 '굳게 지키고 싸우지 말라' 전략에 말렸다(관구검전). |
| 정치 | 53 | 낙양 전농으로서 궁실 공사를 위한 농민 징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산을 뚫어 관개해 백성이 이익을 보았다(관구검전). |
| 매력 | 53 | 고구려의 죽은 사람 묘를 헐지 못하게 하고 사로잡은 처자를 풀어 보냈다(관구검전). 반란 땐 장졸이 가족이 북쪽에 있어 흩어졌다.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구검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