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지명 하나에 학설이 다섯 있었습니다 — 위치는 누가 고르나
점을 찍으려는데 주소가 없었습니다
강유가 군대를 이끌고 머문 곳이 답중(沓中)입니다. 북벌 후반의 강유를 따라가려면 지도에 이 점이 꼭 있어야 해요. 점을 찍으려고 사료를 열었는데, 어디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화양국지』에는 강유가 스스로 의심하고 두려워하다가 돌아와 「답중에서 밀을 심겠다」고 청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維由是自疑惧,返自洮阳,因求种麦沓中,不敢归成都」). 『자치통감』에는 경원 4년에 요화를 보내 답중의 강유를 지원하게 했다는 대목이 있고요(「乃遣廖化将兵诣沓中为姜维继援」). 둘 다 답중이 있었다고만 말하지, 지금의 어디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지난 글에서 「모르는 건 비워 둔다」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지도에서 점이 비면 강유의 마지막 몇 해가 통째로 비어 버립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학설을 찾아 표로 만들었습니다
찾아보니 학설이 갈려 있었습니다. 제 정리표에는 다섯 곳이 올랐습니다.
| 학설 | 내세우는 근거 | 붙은 반론 |
|---|---|---|
| 첩부현(迭部县) | 위키 첩부현 문서에 「迭部在汉代称为沓中」 | 현 단위로 겹친다는 얘기일 뿐 구체적인 지점의 근거는 아님 |
| 첩부 낙대진(洛大镇) | 『중국역사지도집』 삼국 촉 익주 북부 도폭이 답중을 지금의 첩부 낙대로 표시 | 같은 글이 삼국시대 유적과 유물을 못 찾았고, 남북이 높은 산 사이 좁은 지대라 농사지을 땅이 적어 강유의 둔병을 먹이기 어렵다고 적음 |
| 주곡 대욕진(大峪镇) | 백과사전에 「주류 관점의 하나」로 소개됨. 「무당사마」 동인, 「직백오수」 동전, 대욕평의 만인총, 옛 성보와 지하통로가 거론됨 | 동인은 북위 구지국 유물로 보는 해석이 있어 직접 증거가 아니라고 함 |
| 주곡 무평진(武坪镇) | 대욕설과 같은 계열 | 대욕설과 같음 |
| 탕창 남하진(南河镇) | 민강 중상류와 음평 고도의 요충이라는 입지 | 입지 추정에 가까움 |
범위만 적은 서술도 있었습니다. 『감숙성지 대사기』는 「강유가 답중(지금의 주곡 서쪽, 민현 남쪽)으로 물러나 주둔했다」고 쓰고, 호삼성은 통감 주에서 「답중은 여러 강족 사이에 있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밝혀 둘 게 있습니다. 위 표 가운데 백과사전 항목은 요약을 전한 것이고, 그 인용 문헌 몇 개는 원문을 제가 열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섯 설의 근거는 종류가 서로 달라서(도폭 표기, 출토 유물, 지형 입지) 점수를 매겨 한 곳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후화 전투(262년) 화면. 답중에서 출발하는 강유의 행군로와 오른쪽 고도 단면이 함께 보입니다.
그래서 누가 고르나
사서가 안 알려 주고, 학자도 갈리면 결국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 골라야 합니다. 이 점을 숨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도에 찍힌 점은 확정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누군가 한 선택이니까요.
저는 낙대진을 골랐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중국역사지도집』이 답중을 가리킨 곳이라는 것. 이 지도집은 역사 지도의 표준 참고서로 쓰이는 책이라, 다섯 설 가운데 기준으로 세우기 가장 좋았습니다. 반론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표에서 보듯이 낙대진에도 반론이 붙어 있습니다. 고른 이유는 「표준 근거가 있다」, 딱 그것 하나입니다.
그리고 고른 사실을 화면과 파일에 남겼습니다. 좌표에는 「학설(지도집) — 확정 아님」이라고 적었고, 사료가 지점을 특정하지 않으며 같은 글이 반론도 적었다는 메모를 같이 달았습니다. 고르는 건 사람 몫이고, 고른 사람이 표시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고르지 않은 넷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위키의 첩부현 행정 중심 좌표를 기본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낙대진으로 바꾸면서 옛 좌표는 지우지 않고 대체 후보(alt_sites)로 옮겼습니다. 대욕진, 무평진, 남하진도 같은 칸에 있고, 각각 근거 문구와 출처를 붙였어요.
나중에 다른 학설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이면 좌표 하나만 바꾸면 됩니다. 후보를 파일에 남겨 두면 고쳐 쓰는 데 드는 비용이 거의 없거든요. 그리고 독자가 「나는 다른 곳이라고 들었는데」 하고 의심할 때 보여 줄 근거가 됩니다.
이 선택이 뒤에서 일으킨 일
답중 좌표를 옮기고 나니 한 가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답중에서 출발하는 행군로의 최고 고도가 같이 바뀐 거예요. 세 경로를 다시 쟀더니 이렇게 나왔습니다.
| 경로 | 첩부현 좌표 | 낙대진 좌표 |
|---|---|---|
| 후화 방면 강유 출병 (262년) | 4,155m | 3,550m |
| 적도 방면 출격 (255년) | 4,023m | 3,722m |
| 검각 후퇴 (263년) | 3,935m | 3,401m |
점 하나를 어디에 찍느냐로 군대가 넘는 산의 높이가 수백 미터씩 달라졌습니다. 산 높이를 어떻게 쟀는지, 그리고 이 숫자가 왜 중요한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 가겠습니다.

조서·적도 전투(255년) 화면. 답중은 낙대진 좌표에 찍혀 있고, 점 옆에 물음표를 달아 확정이 아님을 표시합니다.
삼국지 아틀라스는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https://victor-house.com/sang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