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費禕) — 정사 삼국지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촉한출생 190년경(추정)사망 253년기록 연도 33해

생몰

출생 190년경(추정) — 생년 불명(190년경 추정).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53년 — 연희 16년(253) 정월 한수(漢壽)의 연회에서 위 항인 곽순에게 피살, 시호 경(敬)(비의전)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21년성도태자 사인 → 서자기록
222년성도태자 사인 → 서자기록
223년성도황문시랑기록
224년성도황문시랑기록
225년무창소신교위 — 오에 사자기록
226년성도시중기록
227년성도시중기록
228년한중참군(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며 청함)기록
229년한중참군(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며 청함)기록
230년한중중호군 → 사마기록
231년한중중호군 → 사마기록
232년한중중호군 → 사마기록
233년한중중호군 → 사마기록
234년성도후군사기록
235년성도상서령기록
236년성도상서령기록
237년성도상서령기록
238년성도대장군·녹상서사기록
239년성도대장군·녹상서사기록
240년성도대장군·녹상서사기록
241년성도대장군·녹상서사기록
242년성도대장군·녹상서사기록
243년성도대장군·녹상서사기록
244년한중대장군 — 흥세에서 위군 격퇴, 성향후기록
245년성도대장군·익주자사 겸임기록
246년성도대장군·익주자사 겸임기록
247년성도대장군·익주자사 겸임기록
248년한중대장군 — 한중에 주둔기록
249년한중대장군 — 한중에 주둔기록
250년한중대장군 — 한중에 주둔기록
251년한중대장군 — 한중에 주둔기록
252년한중대장군 — 한중에 주둔기록
253년가맹대장군·개부 — 한수(漢壽) 연회에서 피살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14~220년촉한(촉에 유학 중 정착, 허숙룡·동윤과 이름을 나란히 함)불명
221~222년촉한태자 사인 → 서자기록
223~224년촉한황문시랑기록
225년촉한소신교위 — 오에 사자기록
226~227년촉한시중기록
228~229년촉한참군(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며 청함)기록
230~233년촉한중호군 → 사마기록
234년촉한후군사기록
235~237년촉한상서령기록
238~243년촉한대장군·녹상서사기록
244년촉한대장군 — 흥세에서 위군 격퇴, 성향후기록
245~247년촉한대장군·익주자사 겸임기록
248~252년촉한대장군 — 한중에 주둔기록
253년촉한대장군·개부 — 한수(漢壽) 연회에서 피살기록

나온 사건·전투

225년 · 소신교위 — 오에 사자 · 외교

제갈량이 남정에서 돌아오자 나이와 지위가 높은 관료들을 제치고 비의만 동승시켜 신망을 얻고, 소신교위로 오에 사신으로 가 손권·제갈각·양도의 논란을 말로 이기지 않게 막힘없이 응대해 손권의 인정을 받는다.

정사 비의전: 승상 제갈량이 남정에서 돌아오자 관료들이 수십 리 밖에서 맞았는데 나이와 지위가 대부분 비의보다 위였으나 제갈량은 특별히 비의만 같은 수레에 타게 해 사람들이 새로 보게 되었다. 제갈량이 비의를 소신교위로 삼아 오에 사신으로 보냈다. 손권은 해학이 많아 놀리고 제갈각·양도 등이 재주와 말솜씨로 논난했으나 비의는 말이 순하고 뜻이 돈독하며 이치에 따라 대답해 끝내 굴하지 않았다. 손권이 크게 아껴 '그대는 천하의 어진 이이니 반드시 촉조의 고굉이 될 것인데 자주 올 수 없을까 걱정'이라 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4 본 「丞相亮南征還群僚於數十里逢迎年位多在禕右而亮特命禕同載由是眾人莫不易觀」

232년 · 중호군 → 사마 · 중재

위연과 양의가 서로 미워해 같이 앉으면 위연이 칼을 겨누고 양의가 울음을 터뜨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비의가 그 사이에 들어 달래고 갈라 제갈량 생전 둘의 쓰임을 모두 살린다. 건흥 8년(230) 중호군이 된 뒤의 일.

정사 비의전: 건흥 8년 중호군이 되었고 뒤에 사마가 되었다. 군사 위연과 장사 양의가 서로 미워해 같이 앉아 다툴 때마다 위연이 칼을 들어 양의를 겨누고 양의는 눈물을 흘렸다. 비의가 늘 그 자리에 들어가 달래고 갈라서 제갈량 생전 위연과 양의가 각기 쓰임을 다하게 한 것은 비의의 구원 덕이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4 본 「值軍師魏延與長史楊儀相憎惡每至並坐爭論延或舉刀擬儀儀泣涕橫集禕常入其坐間諫喻分別」

244년 · 대장군 — 흥세에서 위군 격퇴, 성향후 · 방어

위 조상이 흥세에 이르자 가절을 받아 군을 이끌고 막으러 나간다. 출발 직전 광록대부 내민이 바둑을 청하자 태연히 응해 내민이 '그대는 적을 이길 사람'이라 감탄하고, 비의가 이르자 위군이 물러난다. 성향후에 봉해진다.

정사 비의전: 연희 7년 위군이 흥세에 주둔하자 비의에게 절을 주고 군을 이끌어 막게 했다. 광록대부 내민이 비의의 처소에 와 작별하며 바둑을 청했다. 그때 격문이 오가고 사람과 말이 갑옷을 입고 수레도 준비되어 있었으나 비의는 내민과 바둑에 마음을 두어 싫증 내는 기색이 없었다. 내민이 '아까 시험해 보았을 뿐이오. 그대는 참으로 믿을 만하니 반드시 적을 이길 것'이라 했다. 비의가 이르자 적이 물러나 성향후에 봉해졌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4 본 「光祿大夫來敏至禕許別求共圍棋於時羽檄交馳人馬擐甲嚴駕已訖禕與敏留意對戲色無厭倦」

253년 · 대장군·개부 — 한수(漢壽) 연회에서 피살 · 사망

정월 연회에서 위의 항인 곽순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술에 취해 곽순의 칼에 죽는다. 시호 경후. 한수(漢壽)에 주둔하던 중이었다.

정사 비의전: 연희 15년 비의에게 개부를 명했다. 16년 정월 대회에서 위의 항인 곽순이 자리에 있었는데, 비의가 즐겁게 마시고 취해 곽순의 손에 해를 입었다. 시호는 경후이다. 앞서 장억이 '옛날 잠팽과 내흡이 자객에게 해를 입었으니 장군도 경계하라'고 충고한 바 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4 본 「十六年歲首大會魏降人郭循在坐禕歡飲沉醉為循手刃所害謚曰敬侯」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80연희 7년 흥세에서 위군을 물리쳤다. 이어 대장군으로 녹상서사를 맡았다(비의전).
무력평가 불가무용 기록 없음.
지력83위연·양의의 불화를 중재하고 오 사자로 손권·제갈각의 논난에 말을 막히지 않았다(비의전).
정치87장완 뒤를 이어 상서령·대장군으로 나라를 맡았다(비의전). 외지에서도 상벌은 먼저 비의에게 물었다.
매력88비의의 호방함을 경계한 장억의 충고가 있었으나 연회에서 곽순에게 살해됐다(장억전·비의전).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비의의 이동 경로

촉한 소속 다른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