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69년 — 「時年二十八」(여포를 따라 서주로 갈 때, 195년 전후)에서 환산한 추정
사망 222년 — 황초 3년(222) — 강도에서 병사. 연도는 통설, 전문은 「是歳」(손권 칭번·반복 이후)로만 적음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198년 | 하비 | 중랑장→탕구장군 | 기록 |
| 207년 | 유성 | 탕구장군 | 기록 |
| 215년 | 합비 | 정동장군(합비 주둔) | 기록 |
| 216년 | 합비 | 정동장군(합비 주둔) | 추정 |
| 217년 | 합비 | 정동장군(합비 주둔) | 추정 |
| 218년 | 합비 | 정동장군(합비 주둔) | 추정 |
| 219년 | 합비 | 정동장군(합비 주둔) | 기록 |
| 220년 | 합비 | 전장군·진양후 | 추정 |
| 221년 | 낙양 | 전장군·진양후 | 기록 |
| 222년 | 강도 | 전장군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188년 | 기타·재야 | (병주 출신 군리·연대 불명) | 불명 |
| 189~191년 | 동탁 | 종사(정원→하진→동탁 휘하) | 불명 |
| 192~197년 | 여포 | 기도위·노상(여포 휘하) | 불명 |
| 198년 | 위 | 중랑장→탕구장군 | 기록 |
| 199~206년 | 위 | 중랑장→탕구장군 | 불명 |
| 207년 | 위 | 탕구장군 | 기록 |
| 208~214년 | 위 | 탕구장군 | 불명 |
| 215년 | 위 | 정동장군(합비 주둔) | 기록 |
| 216~218년 | 위 | 정동장군(합비 주둔) | 추정 |
| 219년 | 위 | 정동장군(합비 주둔) | 기록 |
| 220년 | 위 | 전장군·진양후 | 추정 |
| 221년 | 위 | 전장군·진양후 | 기록 |
| 222년 | 위 | 전장군 | 기록 |
하비에서 조조가 여포를 격파하자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 중랑장이 된다.
정사 장료전: 태조가 하비에서 여포를 깨자 장료가 군을 이끌고 항복했고 중랑장에 임명되고 관내후에 봉해졌다.
연의: 연의 19회
관련: 하비 전투
출전: 三國志 卷17 「太祖破呂布於下邳遼將其衆降」
유성 원정에서 조조에게 싸움을 권해 선우 답돈을 베는 선봉이 된다.
정사 장료전: 유성에서 갑자기 오환과 마주치자 장료가 싸움을 권했고 조조가 휘를 건네자 크게 이겨 단우 답돈을 베었다.
연의: 연의 33회
출전: 三國志 卷17 「遼勸太祖戰氣甚奮太祖壯之自以所持麾授遼」 / 三國志 卷17 「斬單于蹋頓」
8백 장사로 합비를 급습해 손권의 10만 군 포위를 뚫는다.
정사 장료전: 손권이 10만으로 합비를 에워싸자 장료가 8백 명을 모아 선등으로 진을 무너뜨리고 손권 휘하까지 돌격했으며, 손권은 10여 일 만에 물러났다. 뒤에 조비가 "합비에서 8백으로 10만을 깼다"고 조서에 적었다.
연의: 연의 67회
관련: 합비 소요진 전투
출전: 三國志 卷17 「遼被甲持戟先登陷陳殺數十人斬二將大呼自名衝壘入至權麾下」 / 三國志 卷17 「遼典以步卒八百破賊十萬」
관우가 번성을 포위하자 손권이 번을 칭하며 회군해 장료도 구원하러 부름받는다.
정사 장료전: 관우가 번에서 조인을 에워싸자 손권이 번을 칭해 장료와 제군을 불러 구원하게 했으나 도착하기 전에 서황이 이미 관우를 깨뜨렸다.
연의: 연의 25회
출전: 三國志 卷17 「關羽圍曹仁於樊會權稱籓召遼及諸軍悉還救仁」
문제가 낙양에서 장료를 불러 파오 형세를 묻고 "옛 소호"라 칭한다.
정사 장료전: 황초 2년 장료가 낙양궁에서 문제를 뵈었고 문제가 건시전에서 친히 오를 깨뜨린 모양을 물었으며 "옛날의 소호"라고 했다.
연의: 연의 11회
출전: 三國志 卷17 「遼朝洛陽宮文帝引遼會建始殿親問破吳意狀」 / 三國志 卷17 「此亦古之召虎也」
병중에 조휴와 해릉으로 가 오군을 막고 강도에서 죽는다.
정사 장료전: 손권이 다시 배반하자 장료가 조휴와 해릉에서 강가에 이르렀고 이 해 오장 여범을 깼으나 병이 깊어 강도에서 죽었다. 시호는 강후.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7 「遼病篤遂薨於江都」
정사 무제기·관우전: 200년 2월 원소가 안량을 보내 백마에서 동군태수 유연을 포위하자, 순유의 계책으로 조조가 연진에서 도하하는 척해 원소의 군을 서쪽으로 끌어낸 다음, 가벼운 군으로 백마를 급습했다. 장료·관우가 선봉으로 올라 안량을 베고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관우전은 관우가 만군 속에서 안량의 머리를 베어 돌아왔다고 전한다.
연의: 연의 25~26회
정사 무제기·원소전: 200년 2월부터 10월까지 이어졌다. 원소는 정병 10만과 기병 1만으로 허도를 치려 했고, 조조는 관도에 군을 모으고 병력이 1만에 못 미쳐 사상자가 열에 두셋이었다. 원소는 높은 망루와 토산에서 영채에 화살을 쏘았고 조조는 발석거(벽력거)로 이를 부수었다. 원소가 땅굴을 파자 조조는 안에 긴 참호를 팠다. 군량이 모자라던 때 허유가 항복해 순우경의 오소 군량 수송을 알리자 조조는 보기 5천으로 밤에 오소를 급습해 순우경 등을 베었고, 장합·고람이 항복하자 원소군이 무너졌다.
연의: 연의 30~31회
정사 무제기: 원소가 죽자 아들 원담이 거기장군을 자칭하며 여양에 주둔했다. 202년 가을 조조가 정벌해 연전하자 원담·원상이 고수했다. 203년 봄 3월 조조가 외곽을 치니 이들이 나와 싸웠으나 대패해 밤에 달아났다. 연의 32회는 원상이 사환을 벤 뒤 직접 나와 장료와 맞서 크게 패하는 것으로 그린다.
연의: 연의 32회
정사 무제기: 204년 4월 조조가 조홍에게 업의 포위를 맡기고 토산·땅굴을 파고 참호를 두르며 장수(漳水)를 터 성을 물에 잠가 성중 굶어 죽은 자가 절반을 넘었다. 7월 원상이 구원하러 돌아와 서산을 따라 오다 조조에게 막혀 달아났다. 8월 심배의 조카 심영이 밤에 성 동문을 열어 조조군이 들어와 심배를 사로잡았다. 연의 32회는 허유의 수공 계책과 지하도로 그린다.
연의: 연의 32회
정사 무제기: 207년 조조가 오환을 치러 무종에서 노룡새로 나갔으나 가을 큰물로 해안 길이 막혔다. 전주의 안내로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우며 500여 리를 개통해 백단·평강을 지나 선비의 뜰을 건너 유성을 향했다. 유성 200리 앞에서 오환이 알아채고 답돈이 수만 기로 맞섰다. 8월 조조가 백랑산에 올라 적의 진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장료를 선봉으로 세워 대파했고 답돈과 명왕 이하를 베었다.
연의: 연의 33회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88 | 합비에서 8백 장사로 손권의 10만 군을 격파했고, 천주산에서 진란·매성을 토벌했다(장료전). |
| 무력 | 94 | 합비에서 선등해 손권의 휘하까지 돌격했고 "장료는 병중이라도 당할 수 없다"는 말을 오군이 들었다(장료전). |
| 지력 | 77 | 적의 항복 의사를 읽어 창희를 설득했고, 군중 반란의 주모자를 가려냈다(장료전). |
| 정치 | 평가 불가 | 정치 업적 기록은 거의 없고 군사 일에 한정된다(장료전). |
| 매력 | 78 | 조비가 "옛날의 소호"에 견주었고 모친을 위해 전각을 지어 주었다(장료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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