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생년 불명(정사에 나이 기록 없음).
사망 216년 — 사망 연도 불명. 215년 투항 때 조조가 진남장군에 봉하고 낭중후에 봉했고, 뒤에 죽어 시호를 원후라 했다(장로전: 魯薨,諡之曰原侯). 216년은 계산용 가정값이다. (추정)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188년 | 한중 | 독의사마(유언 휘하) → 한중 점거 | 추정 |
| 189년 | 한중 | 독의사마(유언 휘하) → 한중 점거 | 추정 |
| 190년 | 한중 | 독의사마(유언 휘하) → 한중 점거 | 추정 |
| 191년 | 한중 | 독의사마(유언 휘하) → 한중 점거 | 추정 |
| 192년 | 한중 | 독의사마(유언 휘하) → 한중 점거 | 추정 |
| 193년 | 한중 | 독의사마(유언 휘하) → 한중 점거 | 추정 |
| 194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195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196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197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198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199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00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01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02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03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04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05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06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07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08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09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10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11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12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13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14년 | 한중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15년 | 한중 · 다른 후보: 낭중 | 진남장군·낭중후(투항)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187년 | 기타·재야 | (조부·부의 오두미도를 이음, 연대 불명) | 불명 |
| 188~193년 | 기타·재야 | 독의사마(유언 휘하) → 한중 점거 | 추정 |
| 194~214년 | 기타·재야 | 한중 사군(師君)·한녕태수 | 기록 |
| 215년 | 위 | 진남장군·낭중후(투항) | 기록 |
| 216년 | 위 | (투항 후 사망 연도 불명) | 불명 |
유언의 독의사마로 한중태수 소고를 치다가 동료 장수를 죽이고 그 무리를 차지한다.
정사 장로전: 유언이 장로를 독의사마로 삼아 별부사마 장수와 함께 한중태수 소고를 치게 했는데, 장로가 장수를 습격해 죽이고 무리를 빼앗았다. 연도는 정사에 없어 유언전의 서술 순서에 맞춘 추정.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08 「魯遂襲脩殺之,奪其眾」
유언이 죽고 유장이 장로의 어머니와 가족을 죽이자 원수가 되어 한중을 차지하고 귀도(鬼道)로 백성을 가르친다.
정사 장로전: 유장은 장로가 순종하지 않는다며 어머니와 집안을 모두 죽였다. 장로는 한중을 점거해 귀도로 백성을 가르치고 사군(師君)이라 자칭했다.
연의: 연의 65회 — 연의 65회는 마초가 한중으로 달려오는 대목에서 장로를 소개하고 오두미도를 다룬다.
출전: 三國志 卷08 「魯遂據漢中,以鬼道教民,自號「師君」」 / 三國志 卷08 「雄據巴、漢垂三十年」
지하에서 옥인이 나오자 부하들이 한녕왕을 칭하게 하려 했으나, 염포의 간언으로 사양한다.
정사 장로전: 백성이 땅에서 옥인을 얻자 부하들이 장로를 한녕왕으로 높이려 했으나 공조 염포가 '왕이 되지 말라'고 간했다. 연도는 정사에 없어 장로가 투항하기 직전(건안 20년)과 이어지는 서술 순서에 맞춘 추정.
연의: 연의 65회 — 연의 65회는 한녕왕 추대를 극화하며 염포의 간언이 이어진다.
출전: 三國志 卷08 「民有地中得玉印者,群下欲尊魯為漢寧王」 / 三國志 卷08 「魯功曹巴西閻圃諫魯曰」
조조가 산관에서 무도로 나와 양평관에 이르자 동생 장위는 수만 명으로 관을 지켰다. 장로는 한중을 들어 항복하려 했다.
정사 장로전: 건안 20년 조조가 산관에서 무도를 지나 양평관에 이르렀다. 장로는 한중을 들어 항복하려 했으나 동생 장위가 군 수만으로 관을 지켰다. 조조가 격파하고 촉으로 들어갔다.
연의: 연의 67회 — 연의 67회는 양평관 전투를 허저의 활약 등으로 극화한다.
출전: 三國志 卷08 「太祖乃自散關出武都征之,至陽平關」 / 三國志 卷08 「其弟衛不肯,率眾數万人拒關堅守」
양평 함락 뒤 파중으로 물러나 창고를 봉해 두었고, 항복해 진남장군·낭중후에 봉해진다.
정사 장로전: 양평관이 무너졌다는 말에 염포가 곧바로 항복하지 말라고 권하자 남산으로 가 파중에 들어갔다. 창고를 봉해 두고 떠난 장로를 조조는 가상히 여겼다. 조조가 진남장군을 주고 낭중후 식읍 1만 호에 봉했다.
연의: 연의 67회 — 연의 67회는 투항과 낭중후 봉작을 극화한다.
출전: 三國志 卷08 「太祖逆拜魯鎮南將軍,待以客禮,封閬中侯,邑萬戶」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6 | 동생 장위가 양평관을 수만 명으로 지켰으나 조조가 격파했다. 장로 본인은 싸우기를 피해 항복하려 했다(장로전). |
| 무력 | 50 | 무예 기록이 없다. 출신 도술(五斗米道)과 종교 조직이 중심이다(장로전). |
| 지력 | 64 | 염포의 간언에 따라 한녕왕 칭호를 사양하고, 양평 함락 뒤 곧바로 투항하지 않고 남산으로 물러나 공을 키우는 계산을 했다(장로전). |
| 정치 | 87 | 귀졸·좨주 제도와 의사(義舍)·의미육으로 장관을 두지 않고 한중을 약 30년 다스렸다(장로전: 雄據巴、漢垂三十年). |
| 매력 | 80 | 백성과 이민족이 편하게 여겼고(民夷便樂之), 항복할 때 창고를 봉해 두고 떠나 조조의 호감을 샀다(장로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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