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요(韋曜) — 정사 삼국지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오출생 생년 불명사망 273년기록 연도 0해

생몰

출생 생년 불명

사망 273년 — 「봉황 2년(272)에 하옥, 이후 주살」로만 적혀 있다. 273은 통설을 둔 자리값

연도별 위치

연도별 위치를 정할 기록이 데이터에 없습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52~257년오태사령(『오서』 편찬)불명
258~263년오중서랑·박사좨주불명
264~271년오중서복야→시중불명
272~273년오시중(하옥)불명

나온 사건·전투

252년 · 태사령(『오서』 편찬)

손량 즉위 후 제갈각이 위요를 태사령으로 삼아 『오서』를 짓게 하고 화핵·설영이 참여한다.

정사 위요전: 손화가 폐위된 뒤 황문시랑이 되었다. 손량이 즉위하고 제갈각이 보정하자 위요를 태사령으로 천거해 『오서』를 짓게 했고 화핵·설영 등이 함께했다. 연도는 손량 즉위(252).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65 「表曜為太史令」

258년 · 중서랑·박사좨주

손휴가 즉위하자 중서랑·박사좨주가 되어 책을 교정하고, 장포의 반대로 입시강론이 무산된다.

정사 위요전: 손휴가 즉위하자 중서랑·박사좨주가 되어 유향의 선례대로 여러 책을 교정했다. 손휴가 위요를 강론에 부르려 했으나 좌장군 장포가 허물이 드러날까 두려워 완강히 막아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65 「孫休踐阼,為中書郎、博士祭酒」

264년 · 중서복야→시중

손호가 즉위하자 고릉정후가 되고 중서복야가 되었다가 시중으로 좌국사를 겸하나, 길조를 말하라는 요구와 손화를 기로 올리라는 요구를 거부해 미움을 산다.

정사 위요전: 손호가 즉위하자 고릉정후, 중서복야로 올랐고 직이 줄어 시중이 되어 늘 좌국사를 겸했다. 각지가 앞다투어 길조를 보고하자 손호가 묻자 위요는 "집집마다 상자 속에 있는 물건일 뿐"이라고 답했고, 아버지 손화의 기를 지으려는 손호에게 손화가 제위에 오르지 않았으니 전이라 해야 한다고 고집해 점점 노여움을 샀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65 「孫皓即位,封高陵亭侯,遷中書僕射」

272년 · 시중(하옥)

봉황 2년 손호의 술자리 강요와 거듭된 거부로 미움이 쌓여 하옥되고, 화핵의 구명 상소에도 풀려나지 못해 처형된다.

정사 위요전: 손호의 연회에서 위요는 평소 2승을 넘기지 못하는데 7승을 강요받았고 연회 뒤 신하를 꺾어 사사로운 허물을 들추게 하는 것도 따르지 않았다. 손호는 명을 받들지 않고 충심이 없다며 쌓인 원한으로 위요를 옥에 가두었다(봉황 2년). 위요가 옥리를 통해 글을 올렸으나 손호는 글이 더럽다고 도리어 따졌고 화핵이 여러 번 구명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위요를 죽였다. 100가구는 영릉으로 옮겨졌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65 「收曜付獄」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평가 불가정사에 능력을 가늠할 기록이 거의 없어 낮은 근거로 둔 값
무력평가 불가정사에 능력을 가늠할 기록이 거의 없어 낮은 근거로 둔 값
지력78『오서』 편찬을 맡아 화핵·설영과 함께 지었다(위요전).
정치50손호가 길조를 말하라 해도 「집집마다 상자에 있는 물건」이라 답하고, 손화를 기(紀)로 올리라는 요구를 「황제가 안 된 사람이니 전이 맞다」며 거부했다(위요전).
매력50손호가 술을 강요하자 경전 문답만 하며 따르지 않아 미움을 샀다(위요전).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위요의 이동 경로

오 소속 다른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