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37년 — 후한서 왕윤전의 사망 때 나이 56세(時年五十六)에서 환산한 값.
사망 192년 — 초평 3년(192), 이각·곽사의 장안 점령 뒤 이각 등에게 붙잡혀 처형됨(후한서 왕윤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184년 | 영천 | 예주자사 | 기록 |
| 185년 | 낙양 | (장양 모함으로 투옥) | 기록 |
| 186년 | 진류 | (이름을 바꾸고 하내·진류에 숨음) | 추정 |
| 187년 | 진류 | (이름을 바꾸고 하내·진류에 숨음) | 추정 |
| 188년 | 진류 | (이름을 바꾸고 하내·진류에 숨음) | 추정 |
| 189년 | 낙양 | 종사중랑·하남윤 → 태복 → 상서령 | 기록 |
| 190년 | 장안 | 사도·수상서령 | 기록 |
| 191년 | 장안 | 사도·온후 | 기록 |
| 192년 | 장안 | 사도(동탁 주살 후 이각에게 피살)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년 | 후한 조정 | 예주자사 | 기록 |
| 185년 | 후한 조정 | (장양 모함으로 투옥) | 기록 |
| 186~188년 | 기타·재야 | (이름을 바꾸고 하내·진류에 숨음) | 추정 |
| 189년 | 후한 조정 | 종사중랑·하남윤 → 태복 → 상서령 | 기록 |
| 190년 | 동탁 | 사도·수상서령 | 기록 |
| 191년 | 동탁 | 사도·온후 | 기록 |
| 192년 | 후한 조정 | 사도(동탁 주살 후 이각에게 피살) | 기록 |
예주자사로 황건을 쳐 항복한 수만 명을 받고, 투항한 황건 속에서 중상시 장양의 빈객이 보낸 편지를 찾아 장양과 황건의 내통을 고발한다.
정사 후한서 왕윤전: 중평 원년 황건이 일어나자 특별히 예주자사에 뽑혔다. 순상·공융 등을 종사로 삼아 황건 별수를 깨고 황보숭·주준 등과 함께 수만 명의 항복을 받았다. 도적 속에서 중상시 장양 빈객의 편지가 나와 장양과 황건이 교통한 사실을 밝혀 올렸으나 장양은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는 데 그치고 영제가 죄를 묻지 않았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後漢書 卷66 「特選拜豫州刺史」 / 後漢書 卷66 「允具發其奸,以狀聞」
장양의 원한으로 이듬해 투옥된다. 하진 등이 구명해 사형을 면한다.
정사 후한서 왕윤전: 장양이 협분을 품고 사건으로 왕윤을 모함해 이듬해 옥에 가뒀다. 사면으로 풀렸으나 열흘 만에 다른 죄로 다시 체포되자 사도 양사가 독약을 보내 자결을 권했으나 왕윤은 거절했다. 대장군 하진·태위 원외·사도 양사의 상소로 사형을 면했고 이듬해 석방됐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後漢書 卷66 「明年,遂傳下獄」
동탁의 천도 때 낙양의 난대·석실 도서 가운데 중요한 것을 거두어 장안으로 옮겨 경적이 남도록 한다.
정사 후한서 왕윤전: 초평 원년 양표를 대신해 사도가 되어 수상서령을 겸했다. 동탁이 관중으로 천도하자 난대·석실의 도서와 비서를 거두어 따랐고 장안에서 조목별로 올렸다. 동탁이 낙양에 남은 동안 조정 대소사가 왕윤에게 맡겨졌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後漢書 卷66 「初平元年,代楊彪為司徒,守尚書令如故」 / 後漢書 卷66 「允悉收斂蘭台、石室圖書秘緯要者以從」
동탁이 장안에 돌아와 입관의 공을 기록하자 왕윤은 온후에 봉해진다. 사손서의 권유로 식읍 2천 호를 받는다.
정사 후한서 왕윤전: 초평 2년 동탁이 장안에 돌아와 입관의 공을 헤아려 왕윤을 온후, 식읍 5천 호로 봉했다. 왕윤이 극구 사양하자 사손서가 '공이 동탁과 함께 같은 지위로 봉해졌는데 혼자 고절을 세우는 것은 화광(和光)의 도가 아니다'라고 하여 식읍 2천 호를 받았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後漢書 卷66 「封允為溫侯,食邑五千戶」
동탁이 입조하는 날 사손서·여포와 짜고 여포가 동탁을 찔러 죽인다. 동탁 일당에는 사면하지 않고 군을 해산하려 한다.
정사 후한서 왕윤전: 초평 3년 봄 비가 60여 일 계속되자 왕윤은 사손서·양찬과 단에 올라 날씨 개기를 빌며 모의를 다졌다. 동탁의 장수 여포를 은밀히 포섭해 내응하게 하고 동탁이 입조해 축하할 때 여포가 찔러 죽였다. 이후 동탁 부곡의 사면과 군 해산 문제로 불안이 번졌다.
연의: 연의 8~9회 — 연의 8~9회가 초선을 이용한 연환계로 극화한 대목이다(초선은 정사에 없는 인물).
관련: 여포, 동탁을 죽이다 · 장안 공방(이각·곽사)
출전: 後漢書 卷66 「乃潛結卓將呂布,使為內應」 / 後漢書 卷66 「會卓入賀,呂布因刺殺之」
이각·곽사가 장안을 포위해 함락하자 여포의 권유를 거절하고 남아 이각에게 붙잡혀 죽는다. 이때 56세.
정사 후한서 왕윤전: 여포가 청쇄문 밖에서 말을 세우고 함께 떠나자고 했으나 왕윤은 '조정이 어린 황제에게 나만 믿고 있으니 어려움을 피해 구차히 살 수 없다'고 했다. 이각이 왕윤과 송익·왕굉을 붙잡아 모두 죽였고 이때 왕윤은 56세였다. 장자 개와 차자 경·정 등 종족 10여 명이 함께 죽었다.
연의: 연의 9회 — 연의 9회가 장안 함락과 왕윤의 최후를 극화한다.
관련: 여포, 동탁을 죽이다 · 장안 공방(이각·곽사)
출전: 後漢書 卷66 「傕乃收允及翼、宏,並殺之」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0 | 동탁의 부곡 처리와 양주 출신 군 해체를 두고 군의 반발을 막지 못해 이각·곽사가 장안을 포위하는 사태를 불렀다(후한서 왕윤전). |
| 무력 | 50 |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다는 서술은 있으나 직접 싸운 기록은 없다(후한서 왕윤전). |
| 지력 | 84 | 동탁에게 굽실거리며 인심을 얻다 사손서·여포와 짜고 동탁을 제거했다. 한편 절충보다 원칙을 고집해 일을 그르쳤다(후한서 왕윤전). |
| 정치 | 83 | 낙양의 도서·비서를 거두어 장안으로 옮겨 경적이 보존된 공이 크다고 평가된다. 하진의 종사중랑·하남윤을 지냈다(후한서 왕윤전). |
| 매력 | 74 | 곽림종이 '하루 천 리를 가는 왕을 보좌할 재목'이라 평했다. 그러나 성품이 엄해 아랫사람이 따르지 않았다(후한서 왕윤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왕윤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