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41년 — 황초 6년(225) 84세 졸(후한서 양표전)에서 역산
사망 225년 — 황초 6년(225) 집에서 졸, 84세(후한서 양표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184년 | 낙양 | 의랑 → 시중·경조윤 → 영천·남양태수 → 태복·위위 | 추정 |
| 185년 | 낙양 | 의랑 → 시중·경조윤 → 영천·남양태수 → 태복·위위 | 추정 |
| 186년 | 낙양 | 의랑 → 시중·경조윤 → 영천·남양태수 → 태복·위위 | 추정 |
| 187년 | 낙양 | 의랑 → 시중·경조윤 → 영천·남양태수 → 태복·위위 | 추정 |
| 188년 | 낙양 | 의랑 → 시중·경조윤 → 영천·남양태수 → 태복·위위 | 추정 |
| 189년 | 낙양 | 태복·위위 → 사공 → 사도 | 기록 |
| 190년 | 낙양 | 사도 — 천도에 반대하다 면관 | 기록 |
| 191년 | 장안 | 대홍려 → 소부 → 태상(장안 종행) | 추정 |
| 192년 | 장안 | 대홍려 → 소부 → 태상(장안 종행) | 추정 |
| 193년 | 장안 | 대홍려 → 소부 → 태상(장안 종행) | 추정 |
| 194년 | 장안 | 태위·녹상서사 | 기록 |
| 195년 | 장안 | 태위 — 이각·곽사의 난에 헌제를 지킴 | 기록 |
| 196년 | 허창 | 태상 → 조조에게 하옥되었다 풀림 | 기록 |
| 197년 | 허창 | 태상 | 기록 |
| 198년 | 허창 | 태상 | 기록 |
| 199년 | 허창 | 태상 | 기록 |
| 200년 | 허창 | 태상 → 면직(건안 10년 205) | 추정 |
| 201년 | 허창 | 태상 → 면직(건안 10년 205) | 추정 |
| 202년 | 허창 | 태상 → 면직(건안 10년 205) | 추정 |
| 203년 | 허창 | 태상 → 면직(건안 10년 205) | 추정 |
| 204년 | 허창 | 태상 → 면직(건안 10년 205) | 추정 |
| 205년 | 허창 | 태상 → 면직(건안 10년 205) | 추정 |
| 206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07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08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09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10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11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12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13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14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15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16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17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18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19년 | 허창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20년 | 낙양 | 광록대부(위 문제 즉위 때 태위 제의를 고사) | 기록 |
| 221년 | 낙양 | 광록대부(위 문제 즉위 때 태위 제의를 고사) | 기록 |
| 222년 | 낙양 | 광록대부(위 문제 즉위 때 태위 제의를 고사) | 기록 |
| 223년 | 낙양 | 광록대부(위 문제 즉위 때 태위 제의를 고사) | 기록 |
| 224년 | 낙양 | 광록대부(위 문제 즉위 때 태위 제의를 고사) | 기록 |
| 225년 | 낙양 | 광록대부(위 문제 즉위 때 태위 제의를 고사)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188년 | 후한 조정 | 의랑 → 시중·경조윤 → 영천·남양태수 → 태복·위위 | 추정 |
| 189년 | 후한 조정 | 태복·위위 → 사공 → 사도 | 기록 |
| 190년 | 후한 조정 | 사도 — 천도에 반대하다 면관 | 기록 |
| 191~193년 | 후한 조정 | 대홍려 → 소부 → 태상(장안 종행) | 추정 |
| 194년 | 후한 조정 | 태위·녹상서사 | 기록 |
| 195년 | 후한 조정 | 태위 — 이각·곽사의 난에 헌제를 지킴 | 기록 |
| 196년 | 후한 조정 | 태상 → 조조에게 하옥되었다 풀림 | 기록 |
| 197~199년 | 후한 조정 | 태상 | 기록 |
| 200~205년 | 후한 조정 | 태상 → 면직(건안 10년 205) | 추정 |
| 206~219년 | 후한 조정 | (은거 — 공연을 더하지 않고 10년을 보냄) | 추정 |
| 220~225년 | 위 | 광록대부(위 문제 즉위 때 태위 제의를 고사) | 기록 |
관동 의병이 일어나자 동탁이 천도를 의논하며 공경에게 의견을 묻자, 백관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 '천도는 천하의 큰일이라 반경의 오천에도 은의 백성이 원망했다'며 홀로 반대한다. 이에 동탁이 노해 재이를 이유로 황완·양표 등을 면직시킨다.
정사 후한서 양표전: 관동에 군이 일어나자 동탁이 두려워 천도해 난을 피하려 했다. 공경을 크게 모아 '고조는 관중에 도읍해 11대, 광무는 낙양에 궁해 지금 10대, 석포참에 따르면 마땅히 장안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백관이 감히 말하지 못하자 양표는 '도읍을 옮기고 제도를 바꾸는 것은 천하의 큰일이라 반경이 다섯 번 옮겼을 때 은의 백성이 서로 원망했다. 천하가 무사하고 백성이 즐거이 안정되었는데 까닭 없이 종묘를 버리고 원릉을 버리면 백성이 놀라 반드시 끓는 난이 생긴다. 석포참은 요사한 책이니 어찌 믿겠는가'라고 했다. 동탁이 사예교위 선파로 하여금 재이를 구실로 황완·양표 등을 면직시켰다가 곧 광록대부에 임명했다.
연의: 연의 6회
출전: 後漢書 卷54 본 「移都改制天下大事故盤庚五遷殷民胥怨」
헌제가 허로 옮긴 직후 조조가 양표에게 불쾌한 기색을 보이고, 원술의 참란 때 양표가 원술과 혼인 관계라는 이유로 폐립을 꾀했다고 모함해 하옥하자 공융이 '주서에 부자·형제의 죄는 서로 미치지 않는다'며 항의해 조조가 어쩔 수 없이 풀어 준다. 건안 원년.
정사 후한서 양표전: 건안 원년 동도에서 허로 천도했다. 이때 원술이 참란하자 조조가 양표가 원술과 혼인 관계임을 이용해 폐립을 꾀한다고 무고해 주청하여 하옥하고 대역으로 탄핵했다. 장작대장 공융이 듣고 조복도 입지 못한 채 조조를 찾아가 '양공은 4세 청덕으로 해내가 우러르며, 주서에 부자·형제의 죄가 서로 미치지 않는다 했는데 하물며 원씨에게 양공의 죄를 돌릴 수 있는가. 내일 곧 옷을 털고 떠나 다시 조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 조조가 어쩔 수 없이 양표를 풀어 주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後漢書 卷54 본 「時袁術僭亂操托彪與術婚姻誣以欲圖廢置奏收下獄劾以大逆將作大匠孔融聞之不及朝服往見操曰」
위 문제가 선양을 받자 태위로 삼으려 사신을 보내자 '한의 삼공으로 난세에 보탬이 되지 못했고 늙고 병들어 새 조정을 도울 수 없다'며 고사하고 광록대부와 궤장을 받아 빈객의 예우를 받는다. 황초 6년(225) 84세로 졸한다.
정사 후한서 양표전: 위 문제가 선양을 받자 양표를 태위로 삼으려 먼저 사신을 보내 뜻을 알렸다. 양표는 '저는 한의 삼공을 지내 세상이 기울고 어지러웠으나 보탬이 되지 못했고 늙고 병들었으니 어찌 새 조정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라며 굳이 사양했다. 이에 광록대부를 제수하고 궤장과 의포를 내렸으며 조회에서 부를 때는 빈객의 예로 대했다. 황초 6년 집에서 졸했고 나이 84세였다. 양진부터 양표까지 4세 태위로 덕업이 이어졌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後漢書 卷54 본 「彪備漢三公遭世傾亂不能有所補益耄年被病豈可讚惟新之朝遂固辭乃授光祿大夫」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평가 불가 | 군 지휘 기록 없음. |
| 무력 | 평가 불가 | 무용 기록 없음. |
| 지력 | 78 | 동탁의 장안 천도 논의에서 '천도는 천하의 큰일, 반경의 오천(五遷)에도 은 백성이 원망했다'며 홀로 반대했다(후한서 양표전). |
| 정치 | 83 | 삼공을 역임하고 헌제의 환도·수행에 절개를 지켰다(후한서 양표전). |
| 매력 | 86 | 공융이 '양공은 4대 청덕'이라 구명해 조조가 풀어 주었고, 아들 양수가 죽자 '일제(金日磾)의 선견이 없음을 부끄럽다'고 답했다(후한서 양표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양표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