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생년 기록 없음
사망 250년 — 가평 2년(250) 졸 — 시호 경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28년 | 협석 | 양평태수→상서 | 추정 |
| 236년 | 낙양 | 상서 | 추정 |
| 241년 | 수춘 | 양주자사·복파장군 | 기록 |
| 242년 | 수춘 | 양주자사·복파장군 | 추정 |
| 243년 | 수춘 | 양주자사·복파장군 | 추정 |
| 246년 | 업 | 소부→형주자사→기주목 | 추정 |
| 249년 | 낙양 | 사예교위→사공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195년 | 기타·재야 | (탁군 용성 출신·모친 상실) | 불명 |
| 196~207년 | 위 | 사공군모연 | 불명 |
| 208~219년 | 위 | 하간군승→형양도위→노상 | 불명 |
| 220~226년 | 위 | 산양·평원·평창·낭야태수 | 불명 |
| 227년 | 위 | 양평태수→상서 | 불명 |
| 228년 | 위 | 양평태수→상서 | 추정 |
| 229~235년 | 위 | 양평태수→상서 | 불명 |
| 236년 | 위 | 상서 | 추정 |
| 237~238년 | 위 | 상서 | 불명 |
| 239~240년 | 위 | 대장군장사·산기상시 | 불명 |
| 241년 | 위 | 양주자사·복파장군 | 기록 |
| 242~243년 | 위 | 양주자사·복파장군 | 추정 |
| 244~245년 | 위 | 소부→형주자사→기주목 | 불명 |
| 246년 | 위 | 소부→형주자사→기주목 | 추정 |
| 247~248년 | 위 | 병주자사·진무장군·호흉노중랑장 | 불명 |
| 249년 | 위 | 사예교위→사공 | 기록 |
| 250년 | 위 | 사공 | 불명 |
조휴를 따라 협석에서 오를 칠 때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말렸으나 듣지 않아 패한다.
정사 손례전: 대사마 조휴를 따라 협석에서 오를 칠 때 손례가 깊이 들어가는 것은 안 된다고 간했으나 조휴가 듣지 않아 패했고, 이후 양평태수를 거쳐 상서가 되었다.
연의: 연의 97회
출전: 三國志 卷24 「從大司馬曹休征吳於夾石禮諫以為不可深入不從而敗」
명제가 궁궐을 짓자 절기가 고르지 않고 곡식이 모자란다며 공사 중단을 고집하고 조서로 민을 풀어 준다.
정사 손례전: 명제가 궁실을 수리할 때 날씨가 고르지 않고 곡식이 적어 손례가 고집스레 공사 중단을 간쟁했고, 이혜가 일을 감독해 한 달 더 하자 주청했으나 손례는 곧바로 현장에 가서 조서라고 일컬으며 백성을 풀어 주었다. 명제는 그 뜻을 기특히 여겨 꾸짖지 않았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4 「禮固爭罷役」 / 三國志 卷24 「禮徑至作所不復重奏稱詔罷民」
양주자사로서 오의 전종이 침입하자 위병을 이끌고 작피에서 막아 크게 싸운다.
정사 손례전: 오 장수 전종이 수만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주의 병사가 쉬고 있어 남은 병사가 적었으나 손례가 직접 위병을 이끌고 작피에서 맞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싸웠고 장병이 반이나 죽었으며 자신은 칼날을 무릅쓰고 말이 여러 번 상처를 입은 채 북을 쳐 적을 물렸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4 「禮躬勒衞兵禦之戰於芍陂自旦及暮將士死傷過半」 / 三國志 卷24 「賊衆乃退」
기주목으로서 청하·평원 8년 경계 소송을 도면에 따라 평원에 속한다고 판정했으나 조상이 반대해 처벌받는다.
정사 손례전: 사마의가 청하·평원이 8년 동안 경계를 다퉜다고 하자 손례는 "열조가 평원에 처음 봉했을 때의 도면으로 결정하자"고 했고 도면에 따라 평원에 속한다고 판단했으나 조상이 청하의 말을 믿고 도면을 쓰지 말라 해 손례가 사직할 듯 상소하자 조상이 노해 탄핵·처벌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4 「今清河平原爭界八年更二刺史靡能決之」 / 三國志 卷24 「案圖宜屬平原」
조상이 처형된 뒤 사예교위로 들어간다.
정사 손례전: 조상이 주살된 뒤 손례는 사예교위가 되었고 7군 5주를 다스리는 동안 모두 위신이 있었으며 사공이 되었고 대리정후에 봉해졌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4 「爽誅後入為司隷校尉凡臨七郡五州皆有威信」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76 | 양주자사로 전종의 침공을 작피에서 막아 자리에서 직접 북을 치며 싸웠다(손례전). |
| 무력 | 70 | 명제 사냥 중 호랑이가 어가에 달려들자 채찍을 던지고 말에서 내려 칼을 휘두르려 했다(손례전). |
| 지력 | 69 | 조휴가 협석에서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말렸으나 듣지 않아 패했다(손례전). |
| 정치 | 74 | 궁궐 공사 중단을 고집했고 조상에게 청하·평원의 경계 판정을 도면에 따라 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처벌받았다(손례전). |
| 매력 | 65 | 곧고 굽히지 않아 조상에게 배척당했고 사마의에게도 "사직이 위태로운 것이 불편하다"고 말했다(손례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손례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