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사망 259년 — 감로 4년 졸(259)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21년 | 낙양 | 낙양전농 | 추정 |
| 244년 | 신야 | 정남장군·도독 형예제군사 | 추정 |
| 250년 | 강릉 | 정남대장군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21년 | 위 | 낙양전농 | 추정 |
| 222~234년 | 위 | 낙양전농 | 불명 |
| 235~243년 | 위 | 연주자사 | 불명 |
| 244년 | 위 | 정남장군·도독 형예제군사 | 추정 |
| 245~249년 | 위 | 정남장군·도독 형예제군사 | 불명 |
| 250년 | 위 | 정남대장군 | 기록 |
| 251~256년 | 위 | 정남대장군 | 불명 |
| 257~259년 | 위 | 사공 | 불명 |
문제가 즉위하자 낙양전농이 되어 서울 땅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백성을 부지런히 권해 개간을 특히 늘린다.
정사 왕창전: 문제가 동궁에 있을 때 태자문학이었고 즉위하자 산기시랑을 거쳐 낙양전농이 되었다. 당시 도기에 나무가 숲을 이루어 있었는데 왕창이 개간하고 백성을 부지런히 권해 개간지가 특히 많았다. 이어 연주자사. 연도는 문제 즉위(220~221)로 추정.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7 「昶斫開荒萊,勤勸百姓,墾田特多」
위가 진·한의 폐단을 이어받아 법제가 번쇄하다 하여 『치론』 20여 편과 병서 10여 편을 지어 청룡 중에 올린다.
정사 왕창전: 명제가 즉위해 양렬장군·관내후가 되었다. 법제가 가혹하고 잘디잘아 국전을 크게 고치지 않고는 치화가 일어날 수 없다 하여 『치론』 20여 편과 병서 10여 편을 짓고 청룡 중에 올렸다. 연도는 본문에 청룡 연간으로만 적혀 추정.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7 「乃著治論」
완이 양양에서 300리 떨어져 군이 흩어져 있고 배는 선지에 있어 급할 때 닿기 어렵다 하여 치소를 신야로 옮기고 형·예 두 주에서 수군을 훈련하며 둔전을 늘린다.
정사 왕창전: 정시 중 서주를 거쳐 정남장군·가절·도독형예제군사가 되었다. 완이 양양에서 300여 리라 군이 흩어져 주둔하고 배가 선지에 있어 급한 일에 서로 구원하기 어렵다 하여 표를 올려 치소를 신야로 옮기고 두 주에서 수군을 훈련했으며 농경을 넓혀 창고가 가득 찼다. 연도는 정시 중으로 추정.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7 「乃表徙治新野,習水軍於二州」
가평 2년 오 손권의 후계 다툼 틈에 강릉·강북을 치자고 상주해 강릉에서 대나무 밧줄 다리로 강을 건너 시적을 쳐 쫓고 장수 종리무·허민을 벤다.
정사 왕창전: 가평 2년 오가 어진 신하를 내쫓고 적서가 다투니 틈을 타 제압할 수 있다며 백제와 이릉 사이 강북 땅을 습격하자고 상주했다. 신성태수 주태가 무·자귀·방릉을, 형주자사 왕기가 이릉을, 왕창이 강릉을 쳤고 양안에서 대나무 밧줄로 다리를 걸어 건너가 쳤다. 오 대장 시적이 밤에 강릉성으로 달아나자 쫓아 수백을 베었고 왕창이 평지로 끌어내려 군을 먼저 돌려보내는 척하고 가죽 갑옷·말·수급을 둘러 보여 성내를 격분시킨 뒤 복병으로 시적을 쳐 이겨 종리무·허민을 베고 갑주·기고·진보를 거두었다. 정남대장군·의동삼사·경릉후.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7 「兩岸引竹絙爲橋,渡水擊之」
제갈탄이 반란하자 협석을 거점으로 강릉을 압박해 시적과 전희를 동쪽으로 못 가게 붙들어 두어 동정을 돕는다.
정사 왕창전: 관구검·문흠 반란 때 군을 이끌어 맞서 공이 있었고 표기장군이 되었다. 제갈탄이 반란하자 협석을 거점으로 강릉을 압박해 시적·전희가 동쪽으로 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제갈탄이 평정된 뒤 조서로 「서군이 급히 나아가 동정의 형세를 이루게 했다」고 평가하고 식읍 천 호를 더해 사공이 되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7 「昶據夾石以逼江陵,持施績、全熈使不得東」
감로 4년 졸하고 목후의 시호를 받는다.
정사 왕창전: 감로 4년 졸했고 시호는 목후, 아들 왕혼이 이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7 「謚曰穆侯」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70 | 가평 2년 강릉에서 오 대장 시적을 쳐 장수 종리무·허민을 베고 갑옷과 기를 거두었다(왕창전). |
| 무력 | 평가 불가 | 무력 기록은 없다. |
| 지력 | 75 | 둔전과 수군을 갖추려 치소를 신야로 옮기고 형·예 두 주에서 수군을 훈련했다(왕창전). |
| 정치 | 76 | 낙양전농으로 황무지를 개간해 개간지를 특히 늘렸다(왕창전). |
| 매력 | 61 | 『치론』 20여 편과 병서 10여 편을 지었고 조카·아들의 이름을 겸실(謙實)에 맞게 짓고 훈계했다(왕창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왕창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