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王觀) — 정사 삼국지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위출생 생년 불명사망 262년기록 연도 3해

생몰

출생 생년 불명 — 생년 불명(정사에 나이 기록 없음).

사망 262년 — 사망 연도 불명. 상도향공(260~) 때 사공에 올라 집에서 죽었다(왕관전: 薨于家). 262년은 계산용 가정값이다. (추정)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20년탁군상서랑·정위감 → 남양·탁군태수추정
221년탁군상서랑·정위감 → 남양·탁군태수추정
222년탁군상서랑·정위감 → 남양·탁군태수추정
223년탁군상서랑·정위감 → 남양·탁군태수추정
224년탁군상서랑·정위감 → 남양·탁군태수추정
225년탁군상서랑·정위감 → 남양·탁군태수추정
226년탁군상서랑·정위감 → 남양·탁군태수추정
249년낙양행중령군(고평릉 사변)기록
260년낙양사공(수 일 만에 사직)기록
261년낙양사공(수 일 만에 사직)기록
262년낙양(사망)추정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184~219년위(동군 늠구 출신, 승상문학연·현령, 연대 불명)불명
220~226년위상서랑·정위감 → 남양·탁군태수추정
227~247년위치서시어사 → 상서·하남윤·소부·태복불명
248년위태복불명
249년위행중령군(고평릉 사변)기록
250~253년위상서불명
254~259년위광록대부 → 우복야불명
260~261년위사공(수 일 만에 사직)기록
262년위(사망)추정

나온 사건·전투

224년 · 상서랑·정위감 → 남양·탁군태수

탁군태수로 북쪽 선비의 침입에 맞서 변방 백성을 열 집 이상씩 모아 둔거하게 하고 경후를 쌓아 방비한다.

정사 왕관전: 탁군은 북으로 선비와 접해 도적이 잦아 왕관이 변방 주민을 열 집 이상씩 모아 살게 하고 경후를 쌓게 했다. 원치 않는 이는 조리를 시켜 돌아가 자제를 돕게 했다. 열흘 만에 모두 이뤄지고 방비가 서자 도적이 그쳤다. 연도는 정사에 없어 문제 때 탁군태수 시기로 추정.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4 「觀令邊民十家已上,屯居,築京候」

249년 · 행중령군(고평릉 사변)

사마의가 조상을 주살할 때 왕관을 중령군 대리로 삼아 조상의 동생 조희의 영을 점거하게 한다.

정사 왕관전: 사마선왕이 조상을 주살하면서 왕관을 행중령군으로 삼아 조상 동생 조희의 영을 점거하게 했고, 관내후에 봉하고 다시 상서가 되어 부마도위를 더했다.

연의: 연의 107회 — 연의 107회가 고평릉 사변을 극화한다(왕관의 역할은 연의에 따로 없다).

관련: 고평릉 사변

출전: 三國志 卷24 「司馬宣王誅爽,使觀行中領軍,據爽弟羲營」

260년 · 사공(수 일 만에 사직) · 승진

상도향공이 즉위하자 사공에 올랐으나 고사하고, 사자가 집에 가 임명하자 수 일 만에 인수를 올리고 돌아간다.

정사 왕관전: 상도향공이 즉위해 양향후에 올렸고 사공으로 올리자 고사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사자가 집으로 가서 임명했다. 수 일 만에 인수를 올리고 수레로 고향 집에 돌아갔다. 집에서 죽으며 '발을 넣을 만한 관, 명기 없이, 봉분도 수목도 없이' 하라고 유언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4 「遷司空,固辭,不許,遣使即第拜授」 / 三國志 卷24 「薨于家,遺令藏足容棺,不設明器,不封不樹」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51군 지휘 기록은 없다. 사마의가 조상을 죽일 때 중령군 대리로 조상 동생 조희의 영을 점거했다(왕관전).
무력평가 불가무력 기록이 없다.
지력69탁군의 변방 주민을 열 집 이상씩 모아 둔을 만들고 경후를 쌓게 해 방비를 세웠다(왕관전).
정치83고당·양천·찬·임 등 여러 현령을 맡아 다스림이 칭송받았다. 하남윤·소부를 지내며 조상 일파의 청탁을 막았다(왕관전).
매력70'군주는 백성을 위해 있다'며 태수의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군 백성을 저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청빈하고 검소하게 아랫사람을 이끌었다(왕관전).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왕관의 이동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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