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사망 228년 — 태화 2년 졸(228)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193년 | 하비 | 도겸 치중 | 추정 |
| 203년 | 허창 | 간의대부·참사공군사 | 추정 |
| 220년 | 업 | 어사대부 | 기록 |
| 221년 | 낙양 | 사공 | 기록 |
| 226년 | 낙양 | 사공→사도 | 기록 |
| 228년 | 낙양 | 사도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93년 | 기타·재야 | 도겸 치중 | 추정 |
| 194~195년 | 기타·재야 | 도겸 치중 | 불명 |
| 196~202년 | 후한 조정 | 회계태수 | 불명 |
| 203년 | 위 | 간의대부·참사공군사 | 추정 |
| 204~219년 | 위 | 간의대부·참사공군사 | 불명 |
| 220년 | 위 | 어사대부 | 기록 |
| 221년 | 위 | 사공 | 기록 |
| 222~225년 | 위 | 사공 | 불명 |
| 226년 | 위 | 사공→사도 | 기록 |
| 227년 | 위 | 사공→사도 | 불명 |
| 228년 | 위 | 사도 | 기록 |
서주에서 조정이 장안에 있을 때 도겸에게 사자를 보내 왕명을 받들 것을 권한다.
정사 왕랑전: 천자가 장안에 있고 관동에서 병사가 일어나자 도겸의 치중 왕랑이 별가 조욱과 함께 도겸에게 「춘추의 뜻은 제후 중 근왕이 으뜸」이라며 사자를 보내라 권했다. 도겸이 조욱을 보내 표를 올리자 천자가 도겸을 안동장군, 조욱을 광릉태수, 왕랑을 회계태수로 삼았다. 연도는 헌제 장안 시절(193)로 추정.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3 「宜遣使奉承王命」
손책이 강을 건너오자 공조 우번이 피하라고 권했으나 한의 관리로서 성을 지키겠다며 싸우다 패해 동야로 달아난다.
정사 왕랑전: 손책이 강을 건너 땅을 공략하자 왕랑의 공조 우번이 힘으로 막기 어려우니 피하자고 했으나 왕랑은 한의 관리로서 성읍을 지켜야 한다며 군을 일으켜 손책과 싸우다 패해 바다를 건너 동야에 이르렀다. 손책이 쫓아와 크게 깼고 왕랑은 손책에게 나아갔다. 손책은 왕랑이 유아하다 하여 꾸짖었을 뿐 해치지 않았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3 「遂舉兵與策戰,敗績」
조조가 표를 올려 불러 곡아에서 강해를 돌아 여러 해 만에 도착해 간의대부·참사공군사가 된다.
정사 왕랑전: 태조가 표를 올려 부르자 왕랑은 곡아에서 강과 바다를 돌아 여러 해 만에 도착했고 간의대부·참사공군사에 임명되었다. 위국이 세워지자 군좨주로서 위군태수를 겸했고 소부·봉상·대리를 거쳤다. 연도는 본문에 없고 추정.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3 「太祖表徵之」
문제가 왕위에 오르자 어사대부·안릉정후가 되고 백성을 기르고 형벌을 줄이라고 상소한다.
정사 왕랑전: 문제가 왕위에 올라 어사대부·안릉정후가 되었다. 상소에서 병란 30여 년 뒤 먼 나라는 아직 복속되지 않고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나 요역을 덜고 어진 수령으로 농사와 인구를 키우면 10년·20년 뒤 병력이 들에 가득할 것이라 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3 「遷御史大夫,封安陵亭侯」
문제가 즉위하자 사공이 되고 낙양 밖에서 사냥하다 밤에 돌아오는 황제에게 경호 법도를 간한다.
정사 왕랑전: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사공으로 바뀌고 낙평향후로 올랐다. 문제가 사냥을 자주 나가 어두운 밤에 궁에 돌아오자 왕랑이 경비·경필의 상례를 어겼다고 상소했고 문제가 「야간 귀환은 유사에 시행하라 했다」고 답했다. 건안 말 오·촉의 전쟁 때는 오와 함께 촉을 칠지 의논에서 서둘러 가지 말자고 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3 「改爲司空,進封樂平鄉侯」
명제가 즉위해 난릉후로 올리자 궁실 조영에 요역을 줄이라고 상소하고 사도가 된다.
정사 왕랑전: 명제가 즉위하자 난릉후로 올랐다. 문소황후 능을 살피러 업에 갔다가 백성의 궁핍을 보고, 궁궐 공사 중이라 요역을 줄이라고 상소했고 사도로 옮겼다. 이어 후궁이 적어 황자가 없다는 점을 아뢰는 상소도 올렸고 명제가 「안타깝다」고 답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3 「明帝即位,進封蘭陵侯」
태화 2년 졸하고 성후의 시호를 받는다. 아들 왕숙이 이었다.
정사 왕랑전: 『역』·『춘추』·『효경』·『주관』 전을 짓고 주의·논기를 남겼다. 태화 2년 졸했고 시호는 성후, 아들 왕숙이 이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3 「謚曰成侯」
정사 손책전: 195년 손책이 원술의 허락을 얻어 군 1천여 명과 기병 수십 필, 빈객 수백으로 장강을 건너 역양에 이르렀을 때 무리가 5~6천이 되었다. 곡아에서 유요를 몰아내고 오군의 엄백호 등을 깼으며, 196년 회계로 건너 태수 왕랑을 깨고 강동 여러 군을 평정했다. 연의 15회는 신정령의 태사자와의 일기토, 소패왕 별명을 더한다.
연의: 연의 15회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평가 불가 | 정사에 능력을 가늠할 기록이 거의 없어 낮은 근거로 둔 값 |
| 무력 | 평가 불가 | 정사에 능력을 가늠할 기록이 거의 없어 낮은 근거로 둔 값 |
| 지력 | 69 | 손책을 막다 패해 바다로 동야까지 달아났으나 지조 있는 한의 관리로 평가됐다(왕랑전). |
| 정치 | 78 | 문제에게 「백성을 기르고 형벌을 줄이라」고 상소했고 조비의 사냥·야행·궁실 조영에 간했으며 명제 때 사도에 올랐다(왕랑전). |
| 매력 | 72 | 유랑·궁핍 속에서도 친지를 거두어 분배를 적게 갖고 많이 나눠 의행이 두드러졌다(왕랑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왕랑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