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생년 기록 없음(20세 때 남양 유학)
사망 218년 — 건안 23년(218) 전후 — 엄재 반란 직후 병사. 전문은 「頃之病卒官」, 연도는 엄재의 난(건안 23년) 통설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192년 | 고밀 | 공융 주부·고밀령 대행 | 추정 |
| 202년 | 고밀 | 원담 별가 | 추정 |
| 203년 | 고밀 | 원담 별가 | 추정 |
| 204년 | 고밀 | 원담 별가 | 추정 |
| 205년 | 고밀 | 독군량→사공연·행사금중랑장→위군태수 | 추정 |
| 206년 | 업 | 독군량→사공연·행사금중랑장→위군태수 | 추정 |
| 208년 | 업 | 위군태수 | 추정 |
| 209년 | 업 | 위군태수 | 추정 |
| 210년 | 업 | 위군태수 | 추정 |
| 211년 | 업 | 위군태수 | 추정 |
| 212년 | 업 | 위군태수 | 추정 |
| 213년 | 업 | 위군태수 | 추정 |
| 214년 | 업 | 위군태수 | 추정 |
| 215년 | 업 | 위군태수 | 추정 |
| 216년 | 업 | 대사농 낭중령→봉상 | 추정 |
| 217년 | 업 | 대사농 낭중령→봉상 | 추정 |
| 218년 | 업 | 봉상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90~191년 | 기타·재야 | 공융 주부·고밀령 대행 | 불명 |
| 192년 | 기타·재야 | 공융 주부·고밀령 대행 | 추정 |
| 193년 | 기타·재야 | 공융 주부·고밀령 대행 | 불명 |
| 194~196년 | 기타·재야 | 공융 공조·교동령 대행 | 불명 |
| 197~201년 | 원소·원씨 | 치중종사→즉묵령→원담 별가 | 불명 |
| 202~204년 | 원소·원씨 | 원담 별가 | 추정 |
| 205~206년 | 위 | 독군량→사공연·행사금중랑장→위군태수 | 추정 |
| 207년 | 위 | 독군량→사공연·행사금중랑장→위군태수 | 불명 |
| 208~215년 | 위 | 위군태수 | 추정 |
| 216~217년 | 위 | 대사농 낭중령→봉상 | 추정 |
| 218년 | 위 | 봉상 | 기록 |
고밀령으로서 호강 손씨가 도적을 숨기자 이민을 이끌어 포위해 도적을 내놓게 한다.
정사 왕수전: 초평 연간 공융이 왕수를 주부·고밀령 대행으로 삼았는데, 호협 손씨가 도적을 숨기자 왕수가 이민을 이끌어 포위하고 "공격하지 않는 자는 같은 죄"라 해 손씨가 두려워 도적을 내놓았고 호강이 위축되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1 「脩將吏民圍之孫氏拒守」 / 三國志 卷11 「孫氏懼乃出賊」
원담이 남피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에서 내려 통곡하고 조조에게 원담 시신 수습을 청해 허락받는다.
정사 왕수전: 조조가 남피에서 원담을 치자 낙안에서 군량을 나르던 왕수가 병사와 종사 수십 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가다 고밀에서 원담의 죽음을 듣고 말에서 내려 "무군언귀(임금이 없으니 어디로 돌아가랴)"라 통곡했고 조조에게 시신 수습을 청해 의리를 칭찬받았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관련: 남피 전투
출전: 三國志 卷11 「至高密聞譚死下馬號哭曰無君焉歸」 / 三國志 卷11 「太祖嘉其義聽之」
남피 평정 뒤 조조가 왕수의 집을 조사해 곡식이 열 곡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사공연에 불러 위군태수에 앉힌다.
정사 왕수전: 조조가 업을 깨고 심배 등의 재산을 몰수하니 수만으로 셌으나 남피를 깨고 왕수의 집을 조사하니 곡식이 열 곡도 안 되고 책이 수백 권뿐이어서 "선비는 이름이 허튼 것이 아니다"라고 탄식했고, 사공연·행사금중랑장으로 부르고 위군태수로 올렸다. 다스림은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 상벌이 분명해 백성이 칭송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1 「士不妄有名」 / 三國志 卷11 「為治抑彊扶弱明賞罰百姓稱之」
엄재가 반란해 궁문을 공격하자 수레가 오기 전에 걸어서 궁문으로 달려간다.
정사 왕수전: 엄재가 반란해 무리 수십 명과 액문을 공격하자 왕수가 변고를 듣고 수레를 부르다 오지 않자 관속을 이끌고 걸어서 궁문에 이르렀고, 종요가 "옛 법으로 경성에 변고가 있으면 구경은 각자 관부에 있다"고 하자 "녹을 먹으면서 어찌 난을 피하랴. 관부에 있는 것이 옛 법이나 난에 달려가는 의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얼마 뒤 병으로 관에서 죽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1 「脩聞變召車馬未至便將官屬步至宮門」 / 三國志 卷11 「食其祿焉避其離」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평가 불가 | 군사 지휘 기록은 없다(왕수전). |
| 무력 | 50 | 교동령으로서 단신으로 기병 수 명만 이끌고 공사씨 집으로 들어가 공사노종 형제를 벤 일이 있다(왕수전). |
| 지력 | 77 | "원씨 형제가 서로 공격하는 것은 패망의 길"이라 원담에게 간언했고 관통이 올 것을 예측해 맞혔다(왕수전). |
| 정치 | 76 | 위군태수로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 백성이 칭송했고, 조조가 원씨 일가의 재산 조사에서 가진 곡식이 열 곡도 안 되는 것을 확인했다(왕수전). |
| 매력 | 76 | 엄재의 반란 때 소집한 수레가 오기 전에 걸어서 궁문에 달려가 "녹을 먹으면서 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했다(왕수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왕수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