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95년경(추정) — 생년 불명(195년경 추정, 황초 연간(220~226) 관내후 사작에서 역산).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55년 — 졸년 불명 — 정사의 마지막 등장은 연희 18년(255) 적도 출병(강유전). 255는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49년 | 성도 | 우장군 — 조상 주살 뒤 위에서 촉으로 망명 | 기록 |
| 250년 | 성도 | 우장군 — 촉에 귀순해 후한 대우 | 추정 |
| 251년 | 성도 | 우장군 — 촉에 귀순해 후한 대우 | 추정 |
| 252년 | 성도 | 우장군 — 촉에 귀순해 후한 대우 | 추정 |
| 253년 | 성도 | 우장군 — 촉에 귀순해 후한 대우 | 추정 |
| 254년 | 성도 | 우장군 — 촉에 귀순해 후한 대우 | 추정 |
| 255년 | 적도 | 거기장군 — 강유와 적도에서 출병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219년 | 기타·재야 | (하후연의 아들로 알려진 시기 — 행적 불명) | 불명 |
| 220~238년 | 위 | 관내후(황초 중 사작) — 하후연의 둘째 아들 | 불명 |
| 239~246년 | 위 | 토촉호군·우장군(정시 중, 박창정후) | 불명 |
| 247년 | 위 | 우장군 — 곽회와 낙서에서 강유와 교전 | 불명 |
| 248년 | 위 | 토촉호군·우장군 | 불명 |
| 249년 | 촉한 | 우장군 — 조상 주살 뒤 위에서 촉으로 망명 | 기록 |
| 250~254년 | 촉한 | 우장군 — 촉에 귀순해 후한 대우 | 추정 |
| 255년 | 촉한 | 거기장군 — 강유와 적도에서 출병 | 기록 |
강유가 농서·남안·금성 경계로 나오자 위 대장군 곽회, 하후패 등이 낙서에서 맞서 싸운다. 오랑캐 왕 치무대 등이 부락을 이끌고 항복해 강유가 이들을 안치한다. 강유전은 이 해를 연희 10년(247)으로 적는다.
정사 강유전: 연희 10년 위장군이 되어 대장군 비의와 함께 상서사를 맡았다. 이해 한산의 평강이가 반란을 일으키자 강유가 군을 이끌고 토평했다. 또 농서·남안·금성 경계로 나가 위 대장군 곽회, 하후패 등과 낙서에서 싸웠다. 호왕 치무대 등이 부락을 들어 항복해 강유가 데리고 돌아와 안치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4 본 「又出隴西南安金城界與魏大將軍郭淮夏侯霸等戰於洮西」
정시 중 토촉호군·우장군으로 박창정후에 올랐고 평소 조상의 후대를 입었던 하후패는 조상이 주살됐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의심해 촉으로 달아난다. 하후연의 옛 공으로 그의 아들은 용서받고 낙랑군으로 옮겨진다.
정사 하후연전: 하후패는 정시 중 토촉호군·우장군이 되었고 박창정후에 올랐으며 평소 조상에게 후대를 받았다. 조상이 주살됐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의심해 촉으로 달아나 들어갔다. 하후연의 옛 공으로 하후패의 아들은 용서받고 낙랑군으로 옮겨졌다.
연의: 연의 107회
출전: 三國志 卷09 본 「爲討蜀護軍右將軍進封博昌亭侯素爲曹爽所厚聞爽誅自疑亡入蜀」
후주전은 이 일을 연희 12년 봄 정월 위가 대장군 조상 등을 주살하자 우장군 하후패가 와서 항복했다고 적는다. 같은 해 4월 후주는 대사면을 내린다.
정사 후주전: 연희 12년 봄 정월 위가 대장군 조상 등을 주살하자 우장군 하후패가 와서 항복했다. 여름 4월 대사면했다. 가을 위장군 강유가 옹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33 본 「魏誅大將軍曹爽等右將軍夏侯霸來降」
후주 유선이 하후패를 만나 '그대 부친은 싸움터에서 해를 입었을 뿐 선친이 손수 벤 것이 아니다'라고 풀어 주고, 아들을 가리키며 '이 아이는 하후씨의 생질'이라 하며 후히 작위와 총애를 내린다. 하후패의 사촌 누이가 장비의 아내가 되어 낳은 딸이 유선의 황후라는 사정이 배경이다.
정사 배송지 주 ― 魏略(하후연전): 하후패의 사촌 누이가 열서넛 살 때 본군에서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장비에게 잡혔다. 장비는 양가의 딸임을 알고 아내로 삼아 딸을 낳았고 그 딸이 유선의 황후가 되었다. 하후패가 촉에 들어가자 유선이 만나 '그대 부친은 행간에서 해를 입었을 뿐 내 선인의 손이 죽인 것이 아니다'라고 풀며 아이를 가리켜 '이는 하후씨의 생질'이라 하고 후히 작위와 총애를 더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09 주(魏略) 「及霸入蜀禪與相見釋之曰卿父自遇害於行間耳非我先人之手刃也」
촉조가 사마의의 덕이 어떠한지 묻자 '장차 가문을 세울 것'이라 답하고, 경사의 준사를 묻자 '종회가 조정을 관장하면 오·촉의 근심이 될 것'이라 한다. 『한진춘추』는 강유의 물음에 사마의가 가문을 세우기에 바빠 외사에 겨를이 없으며 종회가 장차 오·촉의 우환이 되리라 답했다고 적는다(15년 뒤 종회가 촉을 멸한다).
정사 배송지 주 ― 世語: 하후패가 촉으로 달아나자 촉조가 '사마공은 어떤 덕이 있는가' 물었다. 하후패가 '스스로 가문을 세울 것'이라 했다. '경사의 준사는 누구인가' 하니 '종사계가 있고 그가 조정을 맡으면 오·촉의 근심이 될 것'이라 했다. 『한진춘추』는 하후패가 촉에 항복한 뒤 강유가 사마의가 이미 정권을 얻었으니 정벌의 뜻이 있겠느냐고 묻자 하후패가 '그는 가문을 세우기에 바빠 외사에 겨를이 없다. 종회라는 이는 비록 젊으나 끝내 오·촉의 우환이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적고, 15년 뒤 종회가 촉을 멸했다 했다. 배송지는 이 말이 습착치의 글에만 있어 『세어』를 쓰고 보태 적는다고 밝힌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28 주(世語) 「夏侯霸奔蜀蜀朝問司馬公如何德霸曰自當作家門」
거기장군 하후패가 강유와 함께 적도로 출병해 낙서에서 위 옹주자사 왕경을 크게 깨뜨려 왕경의 군사 수만이 죽는다. 왕경이 적도성으로 물러나 지키자 강유가 포위하나 위 정서장군 진태가 구원해 포위를 풀어 강유는 종제로 물러난다. 강유전은 이를 「後十八年」(연희 18년, 255)으로 적는다.
정사 강유전: 연희 18년 거기장군 하후패 등과 함께 적도로 출병해 위 옹주자사 왕경을 낙서에서 크게 깨뜨리니 왕경의 군사 중 죽은 자가 수만이었다. 왕경이 물러나 적도성을 지키자 강유가 에워쌌다. 위 정서장군 진태가 군을 진격시켜 포위를 풀자 강유는 물러나 종제에 머물렀다.
연의: 연의 109~110회
출전: 三國志 卷44 본 「後十八年復與車騎將軍夏侯霸等俱出狄道大破魏雍州刺史王經於洮西」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66 | 위에서 토촉호군·우장군을 지냈고 촉에서는 거기장군으로 강유와 함께 적도로 출병해 낙서에서 왕경을 대파했다(강유전). |
| 무력 | 70 | 곽회와 함께 낙서에서 강유와 싸웠고(강유전), 하후연의 아들이라 무용을 이었다고 하나 개인 무용 기록은 없다. |
| 지력 | 55 | 촉에 투항한 뒤 강유가 사마의의 정벌 의지를 묻자 사마씨가 가문 세우기에 바쁘다고 답하고 종회를 장차 오·촉의 우환으로 짚었다(배송지 주 ― 漢晉春秋·世語). |
| 정치 | 50 | 정치 기록은 거의 없다. 조상의 중용을 입었다는 정도만 전한다(하후연전). |
| 매력 | 60 | 후주 유선이 '부친은 행간에서 해를 입었을 뿐 선인의 손으로 죽인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후히 대했다(배송지 주 ― 魏略, 하후연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하후패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