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70년 — 곽가전 「年三十八」(207년 사망)에서 역산한 170년.
사망 207년 — 건안 12년(207) 유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병이 깊어 졸, 시호 정후(貞侯)(곽가전)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197년 | 허창 | 사공군제주 | 추정 |
| 198년 | 하비 | 사공군제주 | 기록 |
| 199년 | 허창 | 사공군제주 | 추정 |
| 200년 | 허창 | 사공군제주 | 추정 |
| 201년 | 허창 | 사공군제주 | 추정 |
| 202년 | 여양 | 사공군제주 — 여양에서 원담·원상 상대 | 기록 |
| 203년 | 여양 | 사공군제주 — 여양에서 원담·원상 상대 | 추정 |
| 204년 | 업 | 사공군제주 — 업 평정 종군 | 기록 |
| 205년 | 남피 | 사공군제주 — 남피 공격, 유양정후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195년 | 기타·재야 | (영천 양적 출신, 재야) | 불명 |
| 196년 | 기타·재야 | 사도부 벽소(27세) — 원소를 떠남 | 불명 |
| 197년 | 위 | 사공군제주 | 추정 |
| 198년 | 위 | 사공군제주 | 기록 |
| 199~201년 | 위 | 사공군제주 | 추정 |
| 202년 | 위 | 사공군제주 — 여양에서 원담·원상 상대 | 기록 |
| 203년 | 위 | 사공군제주 — 여양에서 원담·원상 상대 | 추정 |
| 204년 | 위 | 사공군제주 — 업 평정 종군 | 기록 |
| 205년 | 위 | 사공군제주 — 남피 공격, 유양정후 | 기록 |
| 206년 | 위 | 사공군제주 | 불명 |
| 207년 | 위 | 사공군제주 — 오환 원정 뒤 유성에서 돌아오다 졸 | 불명 |
원소를 만나 보고 신하와 군주를 가리는 눈이 중요한데 원소는 주공(周公)이 선비에게 몸을 낮춘 것만 흉내 낼 뿐 사람 쓰는 요체를 모른다고 평하고 떠난다. 연도는 본문에 없어 사도부 벽소 나이(27세)로 196년에 둠.
정사 곽가전: 곽가는 처음 북으로 가 원소를 만나 모신 신평·곽도에게 '지혜로운 이는 주인을 헤아리는 데 신중해 백 번 일으켜 백 번 온전해야 공명을 세운다. 원공은 주공이 선비에게 몸을 낮춘 것을 따르려 할 뿐 사람 쓰는 요체를 모르고 일이 많고 요점이 적으며 꾀하기를 좋아하나 결단이 없다'고 하고 마침내 떠났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4 본 「夫智者審於量主故百舉百全而功名可立也」
희지재가 죽은 뒤 계책을 논할 사람이 없다던 조조에게 순욱이 곽가를 천거한다. 불려 가 천하를 논하자 조조는 '나를 대업으로 이끌 이는 반드시 이 사람'이라 했고 곽가도 '참으로 내 주공'이라 기뻐해 사공군제주가 된다. 연도는 본문에 없어 197년으로 둠(추정).
정사 곽가전: 이보다 앞서 영천의 희지재가 조조의 큰 신임을 받다 일찍 죽었다. 조조가 순욱에게 보낸 글에서 '지재가 죽은 뒤 함께 계책을 논할 이가 없으니 여남·영천에 기이한 선비가 많아 누가 이을 만하냐'고 했고, 순욱이 곽가를 천거했다. 불러 천하의 일을 논하게 하자 조조가 '나를 대업으로 이끌 이는 반드시 이 사람'이라 했고 곽가도 나와 '참으로 내 주공'이라 기뻐했다. 표를 올려 사공군제주로 삼았다.
연의: 연의 10회
출전: 三國志 卷14 본 「使孤成大業者必此人也」
하비에서 여포를 세 번 쳐부수었으나 군이 피로해 조조가 돌아가려 하자 곽가가 급히 공격하라고 권해 마침내 여포를 사로잡는다.
정사 곽가전: 여포를 쳐 세 번 싸워 깨뜨리니 여포가 물러나 굳게 지켰다. 이때 사졸이 지쳐 조조가 군을 물리려 하자 곽가가 급히 공격하라고 설득해 마침내 여포를 사로잡았다. 자세한 일은 순유전에 있다.
연의: 연의 19회
관련: 하비 전투, 여포의 최후 · 하비 전투
출전: 三國志 卷14 본 「嘉說太祖急攻之遂禽布」
조조가 객례로 대하던 유비에 대해 '유비는 웅재가 있고 민심을 얻었으며 장비·관우는 모두 만인의 적이니 일찍 처리해야 한다'고 말하나 조조는 영웅을 불러 신의를 밝히려던 때라 따르지 않는다. 연도는 건안 4년 유비 이반 직전(199)으로 둠(추정). 『위서』는 반대로 해를 끼치지 말라고 했다고 하여 배송지가 두 기록이 정반대라고 짚었다.
정사 배송지 주 ― 傅子: 처음 유비가 항복해 오자 조조는 객례로 대하며 예주목으로 삼았다. 곽가가 조조에게 '유비는 웅재가 있고 민심을 크게 얻었으며 장비·관우는 모두 만인의 적으로 목숨을 다해 쓰이니 유비는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때 조조는 영웅을 불러 큰 신의를 밝히려던 때라 곽가의 계책을 따르지 못했다. 배송지는 『위서』의 서술이 『부자』와 정반대라고 덧붙였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 연의는 곽가의 유비 경계를 조조 곁 모사의 건의로 넓게 다루지 않는다.
출전: 三國志 卷14 주(傅子) 「備有雄才而甚得眾心張飛關羽者皆萬人之敵也為之死用」
손책이 관도에서 조조와 원소가 맞선 틈에 허도를 습격하려 한다는 소문에 모두 겁을 먹자, 곽가가 '손책은 새로 강동을 합쳤으나 가볍고 대비가 없어 필부의 손에 죽을 것'이라 예측했고 손책은 강을 건너기 전 허공의 객에게 살해된다.
정사 곽가전: 손책이 천 리를 싸워 강동을 다 얻고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맞섰다는 말을 듣자 강을 건너 북쪽으로 허를 습격하려 했다. 사람들이 겁을 내자 곽가가 '손책은 가볍고 대비가 없어 비록 백만의 무리가 있어도 홀로 중원을 가는 것과 같다. 자객이 숨어 일어나면 한 사람의 적일 뿐이니 필부의 손에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 손책은 강가에서 건너기 전에 과연 허공의 객에게 살해됐다. 배송지는 이 일을 우연의 일치로 보았다.
연의: 연의 29회
관련: 관도 전투
출전: 三國志 卷14 본 「策輕而無備雖有百萬之眾無異於獨行中原也」
원소가 죽은 뒤 여양에서 원담·원상을 쳐 연전연승하자 장수들이 몰아치려 했으나 곽가가 '급히 몰면 서로 뭉치고 늦추면 다툰다'며 형주를 치는 척 남쪽으로 돌아 변을 기다리라고 해 군이 서평까지 갔을 때 원담·원상이 기주를 두고 싸운다.
정사 곽가전: 원소가 죽자 또 원담·원상을 여양에서 토벌해 연전에 여러 번 이겼다. 장수들이 승세를 타 곧 공격하려 했으나 곽가가 '원소는 이 두 아들을 아껴 후사를 세우지 못했고 곽도·봉기가 모신으로 반드시 사이에서 서로 싸우게 만들 것이다. 급히 치면 서로 버티고 늦추면 다툼이 생긴다. 형주의 유표를 치러 가는 것처럼 남으로 향해 그 변을 기다렸다가 변한 뒤에 치면 한 번에 평정할 수 있다'고 했고 조조가 따랐다. 군이 서평에 이르자 원담·원상이 과연 기주를 놓고 다퉜다.
연의: 연의 32회
관련: 여양 전투
출전: 三國志 卷14 본 「不如南向荊州若征劉表者以待其變變成而後擊之可一舉定也」
원담이 원상군에게 패해 평원으로 달아나 신비를 보내 항복을 청하자 조조가 돌아와 구원하고 곽가도 종군해 업을 평정한다.
정사 곽가전: 서평에 이르자 원담·원상이 과연 기주를 놓고 다퉜다. 원담이 원상군에게 패해 평원으로 달아나 지키며 신비를 보내 항복을 빌었다. 조조가 돌아와 구원하고 마침내 따라서 업을 평정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4 본 「遂從定鄴」
남피에서 원담을 공격해 기주가 평정되자 조조가 곽가를 유양정후(洧陽亭侯)에 봉한다. 연도는 건안 10년(205) 기주 평정에 둠.
정사 곽가전: 또 남피에서 원담을 공격해 기주가 평정되었다. 곽가를 유양정후에 봉했다. 『부자』 주에는 하북 평정 뒤 조조가 청·기·유·병의 이름난 선비를 많이 불러 성사 속관으로 삼은 것이 모두 곽가의 계책이라 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관련: 남피 전투
출전: 三國志 卷14 본 「又從攻譚於南皮冀州平封嘉洧陽亭侯」
오환과 원상을 치려 할 때 유표가 유비를 시켜 허를 습격할까 두려워하던 장수들에게 곽가가 '유표는 앉아 말만 하는 객이라 유비를 쓰지 못한다'며 원정을 권한다. 역에 이르러 '병귀신속, 치중을 두고 경병으로 길을 겹쳐 가자'고 하여 노룡새를 넘어 선우 정(庭)을 곧바로 쳐 답돈을 벤다.
정사 곽가전: 조조가 원상과 삼군 오환을 치려 하자 아래에서 유표가 유비로 허를 쳐 조조를 칠까 많이 두려워했다. 곽가가 '유표는 앉아 말하는 객일 뿐이고 스스로 유비를 부릴 재주가 없음을 안다. 무겁게 맡기면 제어 못 하고 가볍게 맡기면 유비가 쓰이지 않으니 나라를 비우고 멀리 가도 공은 근심할 것이 없다'고 했다. 조조가 마침내 가 역에 이르자 곽가가 '병귀신속이다. 지금 천 리를 가 남을 습격하는데 치중이 많아 이로움을 좇기 어렵고 저들이 들으면 반드시 대비하니 치중을 두고 경병으로 길을 겹쳐 나가 불의를 치자'고 했다. 조조가 비밀리에 노룡새로 나와 곧바로 선우의 정을 가리켰고 크게 깨뜨려 답돈 이하를 베었다.
연의: 연의 33회
출전: 三國志 卷14 본 「兵貴神速今千里襲人輜重多難以趣利且彼聞之必為備」
『곽가전』은 '곽가는 깊이 헤아림에 통달하고 사정에 밝았다'고 평하며, 조조는 '오직 봉효만이 내 뜻을 안다'고 했다. 곽가는 38세에 유성에서 돌아오다 병이 깊어 죽고 조조는 상(喪)에 임해 '후사를 맡기려 했는데 중년에 요절했다'며 크게 슬퍼한다.
정사 곽가전: 곽가는 깊이 헤아림에 통달하고 사정에 밝았다. 조조가 '오직 봉효만이 내 뜻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나이 38세에 유성에서 돌아오다 병이 깊어지자 조조가 문병하는 사람이 오갔다. 죽자 조조가 상에 임해 크게 슬퍼하며 순유 등에게 '그대들은 모두 내 또래인데 봉효만 가장 어렸다. 천하 일이 끝나면 후사를 맡기려 했는데 중년에 요절하니 운명인가'라 했다.
연의: 연의 33회
출전: 三國志 卷14 본 「年三十八自柳城還疾篤」
정사 무제기: 207년 조조가 오환을 치러 무종에서 노룡새로 나갔으나 가을 큰물로 해안 길이 막혔다. 전주의 안내로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우며 500여 리를 개통해 백단·평강을 지나 선비의 뜰을 건너 유성을 향했다. 유성 200리 앞에서 오환이 알아채고 답돈이 수만 기로 맞섰다. 8월 조조가 백랑산에 올라 적의 진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장료를 선봉으로 세워 대파했고 답돈과 명왕 이하를 베었다.
연의: 연의 33회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62 | 군제주로서 직접 군을 이끈 기록은 없고, 오환 원정에서 경기(輕騎) 급행을 건의해 군의 진퇴를 정했다(곽가전). |
| 무력 | 평가 불가 | 무용 기록 없음. |
| 지력 | 97 | 하비 포위에서 지친 군을 두고 급공을 권해 여포를 사로잡게 했고, 원씨 형제의 내분을 예측해 군을 남쪽으로 돌렸다(곽가전). |
| 정치 | 72 | 원정 방책과 원씨 평정 뒤 청·기·유·병 인사 등용이 곽가의 계책으로 전한다(곽가전·배송지 주 ― 傅子). 평소 행실을 단속하지 않아 진군이 여러 번 탄핵했으나 조조가 처벌하지 않았다(곽가전). |
| 매력 | 82 | 조조가 '오직 봉효만이 내 뜻을 안다'고 했고, 사후 '후사를 맡기려 했다'고 애도했다(곽가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곽가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