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생년 기록 없음
사망 228년 — 태화 2년(228) 졸 — 전문은 협석 전역 직후 병이 깊어 죽었다고 적음. 연도는 통설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05년 | 강읍 | 민지령 | 추정 |
| 211년 | 홍농 | 참사예군사(의랑) | 추정 |
| 220년 | 낙양 | 업령→위군태수 | 기록 |
| 221년 | 초 | 예주자사·건위장군 | 기록 |
| 222년 | 초 | 예주자사·건위장군 | 추정 |
| 223년 | 초 | 예주자사·건위장군 | 추정 |
| 224년 | 초 | 예주자사·건위장군 | 추정 |
| 225년 | 초 | 예주자사·건위장군 | 추정 |
| 226년 | 초 | 예주자사·건위장군 | 추정 |
| 228년 | 협석 | 전장군 독군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204년 | 후한 조정 | 군리·강읍장(하동 양릉 출신) | 불명 |
| 205년 | 위 | 민지령 | 추정 |
| 206~209년 | 위 | 민지령 | 불명 |
| 210년 | 위 | 참사예군사(의랑) | 불명 |
| 211년 | 위 | 참사예군사(의랑) | 추정 |
| 212~218년 | 위 | 홍농태수→승상주부 | 불명 |
| 219년 | 위 | 간의대부(군계 겸임) | 불명 |
| 220년 | 위 | 업령→위군태수 | 기록 |
| 221년 | 위 | 예주자사·건위장군 | 기록 |
| 222~226년 | 위 | 예주자사·건위장군 | 추정 |
| 227년 | 위 | 예주자사 | 불명 |
| 228년 | 위 | 전장군 독군 | 기록 |
곽원이 하동을 공격해 절의를 시험하자 굽히지 않고 강읍을 지킨다.
정사 가규전: 곽원이 하동을 공격하며 가규가 있는 강읍을 에워쌌고 가규는 끝까지 버텼다. 곽원이 장수로 삼으려 협박했으나 가규는 "나라의 장리가 어찌 적에게 머리를 숙이겠느냐"고 꾸짖었고, 이민이 "어진 군을 죽이려면 같이 죽겠다"고 외치자 곽원이 풀어 주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5 「安有國家長吏爲賊叩頭」 / 三國志 卷15 「負要殺我賢君寧俱死耳」
마초 정벌 때 조조가 홍농태수로 임명하고 "천하 이천석이 가규 같으면 걱정이 없다"고 한다.
정사 가규전: 조조가 마초를 칠 때 홍농이 서도의 요충이라며 가규를 홍농태수로 삼았고 불러 계책을 의논한 뒤 "천하의 이천석이 모두 가규 같으면 내가 무슨 근심이 있겠느냐"고 했다.
연의: 연의 79회
출전: 三國志 卷15 「使天下二千石悉如贾逵吾何憂」
조조가 낙양에서 죽자 장례를 맡고 조창이 옥새의 행방을 묻자 정색해 막는다.
정사 가규전: 태조가 낙양에서 붕어하자 가규가 상사를 맡았고, 언릉후 조창이 장안에서 와 선왕의 옥새가 어디 있는지 묻자 "태자가 업에 있어 국가에 저부가 있으니 선왕의 새수는 군후가 물을 바가 아니다"라고 정색하고 재궁을 업으로 모셨다.
연의: 연의 79회
출전: 三國志 卷15 「先王玺绶非君侯所宜問也」 / 三國志 卷15 「遂奉梓宫還鄴」
예주자사로서 장리의 법 위반을 가차 없이 다스려 문제가 「진짜 자사」라 칭찬하고 예주를 본보기로 삼게 한다.
정사 가규전: 문제가 초에 이르러 가규를 예주자사로 삼았고, 가규는 장리가 법을 가볍게 여기고 도적이 횡행해도 규찰하지 않는 것을 꾸짖은 뒤 이천석 이하 법에 어긋난 자를 모두 면직했다. 문제는 "가규가 진짜 자사"라며 천하에 예주를 본받으라 알렸다.
연의: 연의 111회
출전: 三國志 卷15 「逵真刺史矣」 / 三國志 卷15 「布告天下當以豫州爲法」
조휴가 석정에서 패하자 협석을 점거해 군량을 대 조휴군이 전멸하지 않게 한다.
정사 가규전: 태화 2년 조휴가 환으로 깊이 들어가자 가규는 조휴가 크게 질 것을 예상하고 수륙으로 진군해 200리를 가서 조휴가 패하고 손권이 협석을 끊었다는 말을 들었으며, 다른 장수들이 후군을 기다리자 하나 "지금 급히 나가면 적이 달아날 것"이라며 길을 서둘러 협석을 점거해 조휴군에 군량을 보냈다.
연의: 연의 96회
출전: 三國志 卷15 「乃兼道進軍多設旗鼓爲疑兵」 / 三國志 卷15 「逵据夹石以兵粮给休休軍乃振」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80 | 태화 2년 석정 패전 때 협석을 점거해 군량을 보급하고 조휴군의 전멸을 막았다(가규전). |
| 무력 | 66 | 구원군이 이르기 전에 직접 적의 길목을 쳐 협석을 점거했다(가규전). |
| 지력 | 77 | 조휴가 깊이 들어갈 것을 예측하고 수륙으로 200리를 진군해 적을 속이고 조휴를 구했다(가규전). |
| 정치 | 80 | 예주자사로 제방·수로를 만들어 가후거라 불린 수로를 팠고 장리의 법 위반을 엄정히 다스렸다(가규전). |
| 매력 | 72 | 절의로 곽원에게 굴하지 않았고 조조·문제가 가규를 칭찬했다(가규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가규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