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생년 기록 없음
사망 226년 — 졸년 전문에 명기 없음 — 마지막 기록 연도는 석양 전투(226)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08년 | 장판 | 강하태수(항복 후) | 기록 |
| 209년 | 하구 | 강하태수·토역장군 | 추정 |
| 222년 | 강릉 | 후장군·신야후 | 기록 |
| 223년 | 하구 | 후장군·신야후 | 추정 |
| 224년 | 하구 | 후장군·신야후 | 추정 |
| 225년 | 하구 | 후장군·신야후 | 추정 |
| 226년 | 석양 | 후장군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207년 | 유표 | 유표의 대장(북방 방어) | 불명 |
| 208년 | 위 | 강하태수(항복 후) | 기록 |
| 209년 | 위 | 강하태수·토역장군 | 추정 |
| 210~219년 | 위 | 강하태수·토역장군 | 불명 |
| 220~221년 | 위 | 강하태수 | 불명 |
| 222년 | 위 | 후장군·신야후 | 기록 |
| 223~225년 | 위 | 후장군·신야후 | 추정 |
| 226년 | 위 | 후장군 | 기록 |
유표 사후 유종이 항복하자 한수 건너 조조를 찾아 눈물로 사죄하고 장판에서 유비를 추격한다.
정사 문빙전: 유표가 죽고 유종이 항복했을 때 문빙은 조조에게 "유형주를 보필하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려 "그대는 진짜 충신"이라는 말을 들었고, 병사를 받아 조순과 장판에서 유비를 추격했다.
연의: 연의 42회
관련: 장판 전투
출전: 三國志 卷18 「卿真忠臣也」 / 三國志 卷18 「使與曹純追討劉備於長阪」
강하태수로서 변경의 군무를 맡고 악진과 심구에서 관우를 토벌한다.
정사 문빙전: 형주가 평정되자 강하가 오와 접해 민심이 불안해 조조는 문빙을 강하태수로 삼아 북쪽 병력을 다루게 하고 변경 일을 맡겼다. 악진과 심구에서 관우를 쳤고 한진에서 관우의 치중을 공격해 형성에서 배를 불태웠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18 「乃以聘為江夏太守使典北兵委以邊事」 / 三國志 卷18 「燒其船於荊城」
강릉 포위 때 하후상과 함께 별도 진영으로 면구에 주둔해 적을 막는다.
정사 문빙전: 문제 즉위 후 하후상과 강릉을 포위할 때 문빙은 면구에 따로 주둔하고 석범에서 한 부대를 맡아 막아 공이 있어 후장군·신야후가 되었다.
연의: 연의 71회
출전: 三國志 卷18 「與夏侯尚圍江陵使聘別屯沔口」
손권이 5만으로 석양을 포위했으나 20여 일 동안 굳게 지켜 물리치고 추격해 격파한다.
정사 문빙전: 손권이 5만으로 석양을 급히 포위하자 문빙은 움직이지 않고 굳게 지켰고 손권은 20여 일 만에 물러갔으며 문빙이 추격해 격파했다. 증읍 500호.
연의: 연의 34회
출전: 三國志 卷18 「孫權以五萬眾自圍聘於石陽甚急聘堅守不動」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80 | 강하군 태수로 수십 년 변경을 지켜 오군이 침범하지 못했고 석양 포위전을 견뎌 냈다(문빙전). |
| 무력 | 76 | 관우의 보급을 한진에서 치고 형성에서 배를 불태웠다(문빙전). |
| 지력 | 69 | 악진과 함께 심구에서 관우를 쳐 공을 세웠다(문빙전). |
| 정치 | 62 | "변방 일을 위임받았다"고 적혀 오랜 기간 강하군을 다스렸다(문빙전). |
| 매력 | 72 | 조조에게 "그대는 진정한 충신"이라 칭찬받았고 적국에도 이름이 떨쳤다(문빙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문빙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