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65년경(추정) — 생년 불명(165년경 추정).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00년 — 사망 연도 불명 — 손책의 강동 평정기(199~200년)가 마지막 확실한 기록이라 200년으로 둠. 계산용 가정값.
연도별 위치를 정할 기록이 데이터에 없습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94년 | 기타·재야 | 단양태수(손책 가족이 의탁) | 불명 |
| 195~196년 | 원소·원씨 | (원술이 임명한 지방관으로 손분과 번능·장영 공격) | 불명 |
| 197~198년 | 원소·원씨 | 광릉태수(원술 임명) → 광릉 포기하고 동으로 귀환 | 불명 |
| 199~200년 | 오 | 단양태수(손책 휘하) | 불명 |
서주목 도겸이 손책을 깊이 꺼리자 손책이 외숙 단양태수 오경에게 모친을 모시고 가 여범·손하와 함께 의탁하며, 인연으로 수백 명을 모은다. 흥평 원년.
정사 손파로토역전(손책): 서주목 도겸이 손책을 깊이 꺼려 손책의 외숙으로 당시 단양태수였던 오경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곡아로 옮겨 여범·손하와 함께 의탁했다. 이어 모병해 수백 명을 얻었다. 흥평 원년에는 원술을 따랐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6 본 「策舅呉景時爲丹楊太守策乃載母徙曲阿與呂範孫河俱就景因緣召募得數百人」
유요가 양주자사로 오기 전 원술의 압박으로 오경·손분이 유요를 곡아에 맞았으나, 원술이 참란을 꾀하며 군현을 공격하자 번능·장영이 막았고 오경·손분이 원술에게 임명받은 이들이라 번능·장영이 이들을 쫓아냈다. 원술이 오경·손분과 함께 번능·장영을 1년 넘게 쳐도 이기지 못한다.
정사 유요전: 유요가 남으로 강을 건너려 하자 오경·손분이 곡아에 맞았다. 원술이 참역을 꾀해 여러 군현을 공격하자 유요가 번능·장영을 강변에 보내 막게 했다. 오경·손분이 원술이 임용한 사람이라 하여 번능·장영이 이들을 쫓아냈다. 이에 원술이 스스로 양주자사를 두고 오경·손분과 함께 번능·장영 등을 1년 남짓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손책이 동도해 번능·장영 등을 깨뜨렸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9 본 「欲南渡江吳景孫賁迎置曲阿術圖為僭逆」
원술이 오경에게 광릉을 지키게 하던 중 손책이 강동 정벌 뜻을 알리자 오경이 곧 광릉을 버리고 손책에게 돌아오고, 손책이 오경에게 단양을 다시 맡긴다. 연도는 본문에 없어 손책의 동도(195~197)에서 197년경으로 추정.
정사 오서 손분전·주곤전: 손책이 원술을 떠나 강동을 평정할 때 원술이 오경에게 광릉을 지키게 했고 손책이 오경 등에게 '지금 강동을 정벌하려 하는데 이삼 군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편지하자 오경이 곧 수비를 버리고 돌아왔다(강표전). 손책이 주곤에게 단양태수를 겸하게 했으나 오경이 광릉을 버리고 동쪽으로 오자 주곤은 다시 단양 수령이 되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50 본 「會吳景委廣陵來東復為丹楊守」
정사 손책전: 195년 손책이 원술의 허락을 얻어 군 1천여 명과 기병 수십 필, 빈객 수백으로 장강을 건너 역양에 이르렀을 때 무리가 5~6천이 되었다. 곡아에서 유요를 몰아내고 오군의 엄백호 등을 깼으며, 196년 회계로 건너 태수 왕랑을 깨고 강동 여러 군을 평정했다. 연의 15회는 신정령의 태사자와의 일기토, 소패왕 별명을 더한다.
연의: 연의 15회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63 | 손책의 외숙으로 단양태수를 지내 손책 가족을 맞아 주었다(손파로토역전·유요전). |
| 무력 | 52 | 무용 기록은 적다. 손분과 함께 번능·장영을 쳤으나 1년 넘게 이기지 못했다(오서 손분전). |
| 지력 | 53 | 손책이 동도할 때 광릉에서 돌아와 단양 군을 지켰다(오서 주치전·오군 전). |
| 정치 | 61 | 단양태수·광릉태수를 겸해 지방을 다스렸다. |
| 매력 | 60 | 원술의 장수로 쓰이다 손책을 따라 돌아섰다(손분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오경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