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楊戲) — 정사 삼국지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촉한출생 200년경(추정)사망 261년기록 연도 13해

생몰

출생 200년경(추정) — 생년 불명(200년경 추정).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61년 — 경요 4년(261) 졸(양희전)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20년성도주 서좌 → 독군종사 → 부(府) 속주부기록
221년성도주 서좌 → 독군종사 → 부(府) 속주부기록
222년성도주 서좌 → 독군종사 → 부(府) 속주부기록
223년성도주 서좌 → 독군종사 → 부(府) 속주부기록
224년성도주 서좌 → 독군종사 → 부(府) 속주부기록
225년성도주 서좌 → 독군종사 → 부(府) 속주부기록
226년성도주 서좌 → 독군종사 → 부(府) 속주부기록
227년한중속주부 — 승상부추정
228년한중속주부 — 승상부추정
229년한중속주부 — 승상부추정
230년한중속주부 — 승상부추정
231년한중속주부 — 승상부추정
232년한중속주부 — 승상부추정
233년한중속주부 — 승상부추정
234년한중속주부 — 승상부추정
235년성도상서우선부랑 → 치중종사사 → 동조연추정
236년성도상서우선부랑 → 치중종사사 → 동조연추정
237년성도상서우선부랑 → 치중종사사 → 동조연추정
238년성도상서우선부랑 → 치중종사사 → 동조연추정
239년성도상서우선부랑 → 치중종사사 → 동조연추정
240년성도남중랑 참군(교강도독 부이) 영 건녕태수 — 『계한보신찬』 저술기록
241년성도남중랑 참군(교강도독 부이) 영 건녕태수 — 『계한보신찬』 저술기록
242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43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44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45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46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47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48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49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50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51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52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53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54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55년성도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58년성도서인기록
259년성도서인기록
260년성도서인기록
261년성도서인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20~226년촉한주 서좌 → 독군종사 → 부(府) 속주부기록
227~234년촉한속주부 — 승상부추정
235~239년촉한상서우선부랑 → 치중종사사 → 동조연추정
240~241년촉한남중랑 참군(교강도독 부이) 영 건녕태수 — 『계한보신찬』 저술기록
242~255년촉한호군감군 → 재동태수 → 사성교위추정
256~257년촉한사성교위 — 강유의 망수(芒水) 출군을 따름, 면관불명
258~261년촉한서인기록

나온 사건·전투

241년 · 남중랑 참군(교강도독 부이) 영 건녕태수 — 『계한보신찬』 저술 · 저술

연희 4년에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을 지어 소열제·제갈량 이하 촉한 신하들을 찬(贊)으로 기린다. 이후 졸한 자는 시호를 추증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정사 양희전: 양희가 연희 4년 『계한보신찬』을 지어 송술한 인물이 지금 촉서에 많이 실려 있어 여기에 기록한다고 했다. 이 뒤에 졸한 사람은 추시하지 않으므로 기록될 만한 사람이 편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5 본 「戲以著季漢輔臣贊其所頌述今多載於蜀書是以記之於左」

257년 · 사성교위 — 강유의 망수(芒水) 출군을 따름, 면관 · 면관

강유를 따라 망수까지 출군했을 때 속으로 강유를 따르지 않아 술자리에서 조롱하는 말이 나왔고, 강유가 이를 불쾌히 여겨 유사에 아뢰어 면관되어 서인이 된다. 연희 20년.

정사 양희전: 연희 20년 대장군 강유를 따라 망수까지 군을 따라갔다. 양희는 속으로 강유를 따르지 않아 술에 취해 웃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늘 조롱하는 말이 있었다. 강유는 겉으로는 너그러우나 속으로는 시기심이 많아 참을 수 없었고, 군이 돌아가자 유사가 뜻을 받아 양희를 상주하여 면관되어 서인이 되었다. 뒤에 경요 4년에 졸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5 본 「戲素心不服維酒後言笑每有傲弄之辭維外寬內忌意不能堪軍還有司承旨奏戲免為庶人」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50군 지휘 기록 없음. 남중랑 참군으로 건녕태수를 겸했다(양희전).
무력평가 불가무용 기록 없음.
지력71법을 논해 의문을 가르는 일이 공평하다는 평을 들었다(양희전).
정치70건녕태수·재동태수·사성교위 등을 지냈으나 모두 청검하고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양희전).
매력58강유를 속으로 따르지 않아 술자리에서 조롱하다 면관되어 서인이 되었다(양희전).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양희의 이동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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