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63년 — 순욱전 「時年二十九」(초평 2년=191)·「時年五十」(건안 17년=212)
사망 212년 — 건안 17년(212) — 수춘에서 병사. 전문은 「憂薨」(근심으로 죽음)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194년 | 견성 | 사마(견성 수비) | 기록 |
| 196년 | 낙양 | 한 시중·수상서령 | 기록 |
| 197년 | 허창 | 한 시중·수상서령 | 추정 |
| 198년 | 허창 | 한 시중·수상서령 | 추정 |
| 199년 | 허창 | 한 시중·수상서령 | 추정 |
| 200년 | 허창 | 한 시중·수상서령 | 기록 |
| 201년 | 허창 | 한 시중·수상서령 | 추정 |
| 202년 | 허창 | 한 시중·수상서령 | 추정 |
| 203년 | 허창 | 한 시중·수상서령 | 추정 |
| 204년 | 업 | 한 시중·수상서령 | 기록 |
| 205년 | 허창 | 한 시중·수상서령 | 추정 |
| 206년 | 허창 | 한 시중·수상서령 | 추정 |
| 207년 | 허창 | 한 시중·수상서령 | 추정 |
| 212년 | 수춘 | 시중·광록대부(참승상군사)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84~188년 | 후한 조정 | (영천 출신·수학) | 불명 |
| 189~190년 | 후한 조정 | 수궁령→항보령(관직 버림) | 불명 |
| 191~193년 | 위 | 사마(조조 종사) | 불명 |
| 194년 | 위 | 사마(견성 수비) | 기록 |
| 195년 | 위 | 사마(견성 수비) | 불명 |
| 196년 | 위 | 한 시중·수상서령 | 기록 |
| 197~199년 | 위 | 한 시중·수상서령 | 추정 |
| 200년 | 위 | 한 시중·수상서령 | 기록 |
| 201~203년 | 위 | 한 시중·수상서령 | 추정 |
| 204년 | 위 | 한 시중·수상서령 | 기록 |
| 205~207년 | 위 | 한 시중·수상서령 | 추정 |
| 208~211년 | 위 | 시중·광록대부(참승상군사) | 불명 |
| 212년 | 위 | 시중·광록대부(참승상군사) | 기록 |
조조가 도겸을 치는 사이 장막·진궁이 여포를 맞아들이자 군을 정돈하고 하후돈을 불러 견성·범·동아 3성을 지킨다.
정사 순욱전: 홍평 원년 장막이 여포를 맞이하자 순욱이 즉시 군비를 갖추고 하후돈을 불러 모반한 자 수십 명을 베어 군심을 안정시켰고, 정욱과 계책을 세워 범·동아를 설득해 3성을 보전한 채 조조를 기다렸다.
연의: 연의 11회
출전: 三國志 卷10 「彧知邈爲亂即勒兵設備馳召東郡太守夏侯惇」 / 三國志 卷10 「卒全三城以待太祖」
헌제를 맞이해 허로 도읍을 옮기도록 조조에게 권한다.
정사 순욱전: 건안 원년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순욱이 "진 문공이 주 양왕을 받들어 제후가 따른 것"의 예를 들어 조조에게 천자를 맞아 허에 도읍하도록 권했고, 천자는 조조를 대장군으로 삼고 순욱을 한 시중·수상서령으로 올렸다.
연의: 연의 14회
출전: 三國志 卷10 「太祖遂至洛陽奉迎天子都許」 / 三國志 卷10 「進彧爲漢侍中守尚書令」
관도에서 군량이 떨어져 후퇴를 고민하는 조조에게 "먼저 물러나는 쪽이 세력이 꺾인다"며 버티라고 한다.
정사 순욱전: 건안 5년 조조가 군량이 다해 허로 물러나 원소를 끌어내자는 편지를 보내자 순욱이 "초한 형양·성고 사이보다 낫다. 정세가 다해 변고가 날 때이니 기병의 때를 놓치지 마라"고 답했고, 조조는 머물러 순우경을 격파했다.
연의: 연의 30회
관련: 관도 전투
출전: 三國志 卷10 「先退者勢屈也」 / 三國志 卷10 「情見勢竭必將有變此用奇之時不可失也」
업 함락 뒤 조조가 구주제 부활을 추진하자 기주의 영토가 불어나 인심이 흔들린다며 만류한다.
정사 순욱전: 조조가 업을 함락해 기주목이 되었을 때 구주를 복구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순욱이 기주가 하동 등의 땅을 얻으면 관우 제장이 동요하고 원담·유표가 이용할 것이라며 만류했고 조조가 구주 논의를 접었다.
연의: 연의 21회
출전: 三國志 卷10 「若是則冀州當得河東馮翊扶風西河幽并之地」 / 三國志 卷10 「太祖遂寢九州議」
조조가 위공이 되는 것을 반대한 뒤 손권 정벌 중 수춘에서 근심 끝에 죽는다.
정사 순욱전: 건안 17년 동소 등이 조조를 국공으로 올리고 구석을 주자 하자 순욱은 "군자는 덕으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며 반대했고 조조는 마음이 평안치 않았다. 손권 정벌 중 순욱이 수춘에서 병들어 근심으로 죽었다. 시호 경후.
연의: 연의 61회
출전: 三國志 卷10 「君子愛人以德不宜如此」 / 三國志 卷10 「彧疾留壽春以憂薨」
정사 무제기·여포전: 장막·진궁이 조조를 배반해 여포를 맞아 연주목으로 세웠다. 군현이 호응했으나 견성·동아·범현은 순욱·정욱이 지켜냈다.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와 복양에서 싸웠으나 불리했고 백여 일 대치했다. 조조는 여포의 기병이 청주병을 먼저 때리자 진이 흐트러지고 불길 속에서 말에서 떨어져 왼손바닥을 데었다. 그해 메뚜기 떼가 일어 곡식이 모자라 양쪽이 군을 물렸다.
연의: 연의 11~12회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3 | 후방 업무를 맡아 군수를 조달했고 원정 중 허도의 정무를 총괄했다(순욱전). |
| 무력 | 평가 불가 | 무용 기록은 없다. |
| 지력 | 96 | 관도 때 "초한 형양·성고 사이보다 낫지 않다"며 후퇴를 막아 원소를 격파하는 전기를 만들었다(순욱전). |
| 정치 | 98 | 연주를 지키고 헌제를 허로 모시도록 권했으며 군국의 일을 맡아 조조의 후방 정무를 총괄했다(순욱전). |
| 매력 | 92 | 곽가·순유·종요 등을 천거해 모두 직무를 감당했으며, 하옹이 "왕을 보좌할 재목"이라 했다(순욱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순욱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