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90년경(추정) — 생년 불명(190년경 추정, 입촉 때 '20여 세'라는 본문에서 역산).
사망 220년 — 건안 25년(220) 전후, 선주가 자결을 명함(유봉전). 연도는 본문에 없음.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14년 | 성도 | 부군중랑장 | 기록 |
| 219년 | 상용 | 부군장군(상용 주둔) | 기록 |
| 220년 | 성도 | 부군장군 → 자결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1~213년 | 촉한 | (유비의 양자, 형주 거주 — 연대 불명) | 불명 |
| 214년 | 촉한 | 부군중랑장 | 기록 |
| 215~218년 | 촉한 | 부군중랑장 | 불명 |
| 219년 | 촉한 | 부군장군(상용 주둔) | 기록 |
| 220년 | 촉한 | 부군장군 → 자결 | 기록 |
입촉 때 20여 세로 제갈량·장비와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 가는 곳마다 이기고, 익주 평정 뒤 부군중랑장이 된다.
정사 유봉전: 선주가 입촉해 가맹에서 돌아와 유장을 칠 때 유봉은 20여 세로 무예와 기력이 뛰어났다. 제갈량·장비 등과 강을 거슬러 올라 가는 곳마다 이겼고, 익주가 평정되자 부군중랑장이 되었다.
연의: 연의 63회
출전: 三國志 卷40 본 「益州既定以封為副軍中郎將」
맹달이 방릉·상용으로 나가자 한중에서 면수로 내려가 상용에서 합류해 신탐을 항복시키고 부군장군이 된다. 관우가 번성을 포위해 구원을 청했으나 산군이 막 복속했다며 응하지 않는다.
정사 유봉전: 건안 24년 맹달이 방릉을 쳤고 선주는 유봉을 한중에서 면수로 내려보내 맹달군을 통솔하고 상용에서 합치게 했다. 상용태수 신탐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 유봉은 부군장군으로 옮겼다. 관우가 번성·양양을 포위하고 유봉과 맹달을 연달아 불렀으나 산군이 막 복속했다며 관우의 명을 받들지 않았다.
연의: 연의 76회
출전: 三國志 卷40 본 「自關羽圍樊城襄陽連呼封達令發兵自助封達辭以山郡初附未可動搖不承羽命」
맹달과 다툰 끝에 맹달이 위에 투항하고, 하후상·서황이 맹달과 함께 상용을 치자 신의 배반으로 달아나 성도로 돌아온다.
정사 유봉전: 유봉이 맹달의 고취를 빼앗자 맹달이 두려워하다 분개해 선주에게 사직 표를 올리고 휘하를 이끌고 위에 항복했다. 위가 하후상·서황으로 맹달과 함께 유봉을 치자 신의가 배반했고 유봉은 패해 성도로 돌아왔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0 본 「申儀叛封封破走還成都」
선주가 맹달을 침릉하고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일을 꾸짖고, 제갈량이 후환을 우려해 자결하게 한다. 연도는 본문에 없다.
정사 유봉전: 선주가 유봉이 맹달을 침릉하고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제갈량은 유봉이 강맹하여 다음 대에 제어하기 어렵다고 보아 이 기회에 제거하라 권했고, 선주가 사사했다. 유봉은 '맹자도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이 한이다'라고 탄식했다.
연의: 연의 77회
출전: 三國志 卷40 본 「封歎曰恨不用孟子度之言先主為之流涕」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63 | 상용에서 맹달과 합류해 신탐을 항복시키고 부군장군이 되었다(유봉전). |
| 무력 | 83 | '무예가 있고 기력이 남보다 뛰어났다'(유봉전). 입촉 때 제갈량·장비 등과 강을 거슬러 올라 가는 곳마다 이겼다. |
| 지력 | 50 | 판단 기록 없음. 관우의 구원 요청을 산군이 막 복속했다며 거절했다(유봉전). |
| 정치 | 평가 불가 | 맹달의 고취(鼓吹)를 빼앗아 다툼을 일으킨 일 외에 정무 기록은 없다(유봉전). |
| 매력 | 50 | 맹달이 '친하지 않은데 권세에 앉았다'고 했다. 제갈량은 '강맹하여 훗날 제어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유봉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유봉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