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사망 210년 — 「재직 11년에 졸」로만 적혀 연도 없음. 예장태수 취임 약 199년부터 11년으로 계산한 자리값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195년 | 역양 | 단양도위·행정로장군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192~194년 | 오 | (손견 사후 병력 통솔) | 불명 |
| 195년 | 오 | 단양도위·행정로장군 | 기록 |
| 196~198년 | 오 | 단양도위·행정로장군 | 불명 |
| 199~207년 | 오 | 예장태수 | 불명 |
| 208~210년 | 오 | 정로장군 | 불명 |
손견이 전사하자 남은 병력을 거느리고 영구를 모셔 간다.
정사 손분전: 손견이 죽자 손분이 남은 군을 거느리고 영구를 모셔 보냈다. 그 뒤 원술이 수춘으로 옮기자 의지했고 원술이 손분을 시켜 구강의 주앙을 음릉에서 격파하게 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51 「賁攝帥餘眾,扶送靈柩」
유요에게 쫓겨 역양으로 물러났다가 손책 도강 때 오경과 함께 장영·번능을 격파하는 데 호응한다.
정사 손분전: 원술이 손분을 예주자사에 표청하고 단양도위·행정로장군으로 옮겨 산월을 토벌했으나 양주자사 유요에게 쫓겨나 사졸을 이끌고 역양으로 돌아가 머물렀다. 원술이 다시 손분과 오경으로 번능·장영 등을 치게 했으나 못 뽑았고, 손책이 동으로 건너오자 손분·오경을 도와 번능·장영 등을 깼다. 연도는 손책의 도강(195)으로 둠.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51 「因將士眾還住歷陽」
손책을 따라 유훈·황조를 치고 돌아오는 길에 유요가 병사했다는 소식에 예장을 평정, 손책이 손분을 태수로 표청한다.
정사 손분전: 원술이 참호하자 손분은 구강태수 임명을 받지 않고 처자를 버리고 강남으로 돌아왔다. 손책이 오·회계를 평정한 뒤 손분과 함께 여강태수 유훈, 강하태수 황조를 쳤고, 군을 돌릴 때 유요가 병으로 죽은 소식을 듣고 예장을 평정, 손책이 손분을 예장태수로 올렸다가 도정후에 봉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51 「過定豫章,上賁領太守」
건안 13년 사자 유은이 조서로 손분을 정로장군으로 삼고 예장을 그대로 맡긴다.
정사 손분전: 건안 13년 사자 유은이 조서를 받들어 손분을 정로장군으로 제수하고 군을 그대로 맡겼다. 재직 11년 만에 졸했고 아들 손린이 계승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51 「拜賁為征虜將軍,領郡如故」
재직 11년 만에 졸한다.
정사 손분전: 재직 11년 만에 졸했다. 아들 손린(9세)이 예장을 이어받았고 후에 거의 20년 군에 있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51 「在官十一年卒」
정사 손견전: 원술이 손견을 시켜 형주의 유표를 치게 했다. 유표가 황조를 보내 번성·등현 사이에서 맞서자 손견이 이를 깨고 한수를 건너 양양을 포위했다. 손견이 혼자 말을 타고 현산을 가다가 황조 군사에게 화살을 맞아 죽었다. 연의 7회는 유표의 장수 채모·괴월과의 싸움, 현산 매복 화살과 돌로 그린다.
연의: 연의 7회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평가 불가 | 정사에 능력을 가늠할 기록이 거의 없어 낮은 근거로 둔 값 |
| 무력 | 60 | 손견 전사 뒤 남은 병력을 거느려 영구를 모셔 왔다(손분전). |
| 지력 | 50 | 손견 사후 원술에게 의탁한 뒤 주앙을 음릉에서 격파했다(손분전). |
| 정치 | 66 | 예장태수로서 재직 11년에 졸했고 아들 손린이 9세에 예장을 이었다(손분전). |
| 매력 | 62 | 동생 손보를 어려서부터 손수 길러 우애가 두터웠다(손분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손분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