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완(蔣琬) — 정사 삼국지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촉한출생 187년경(추정)사망 246년기록 연도 25해

생몰

출생 187년경(추정) — 생년 불명(187년경 추정, 입촉 때 '약관'에 가까웠다는 서술에서 역산). 계산용 가정값이며 표시는 '추정'.

사망 246년 — 연희 9년(246) 부에서 졸, 시호 공(恭)(장완전)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14년성도광도장 → 면직기록
219년성도상서랑추정
220년성도상서랑추정
221년성도상서랑추정
222년성도상서랑추정
223년성도동조연 → 참군기록
224년성도동조연 → 참군기록
225년성도동조연 → 참군기록
226년성도동조연 → 참군기록
227년성도참군 — 유부 통솔(장예와)기록
228년성도참군 — 유부 통솔(장예와)기록
229년성도참군 — 유부 통솔(장예와)기록
230년성도장사·무군장군기록
231년성도장사·무군장군기록
232년성도장사·무군장군기록
233년성도장사·무군장군기록
234년성도상서령 → 행도호·가절·익주자사기록
235년성도대장군·녹상서사·안양정후기록
236년성도대장군·녹상서사·안양정후기록
237년성도대장군·녹상서사·안양정후기록
238년한중대사마(대장군 개부) — 한중 주둔기록
239년한중대사마(대장군 개부) — 한중 주둔기록
240년한중대사마(대장군 개부) — 한중 주둔기록
241년한중대사마(대장군 개부) — 한중 주둔기록
242년한중대사마(대장군 개부) — 한중 주둔기록
243년부성대사마 — 부로 돌아가 주둔기록
244년부성대사마 — 부로 돌아가 주둔기록
245년부성대사마 — 부로 돌아가 주둔기록
246년부성대사마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08~213년촉한주서좌 — 선주를 따라 입촉불명
214년촉한광도장 → 면직기록
215~218년촉한십방령불명
219~222년촉한상서랑추정
223~226년촉한동조연 → 참군기록
227~229년촉한참군 — 유부 통솔(장예와)기록
230~233년촉한장사·무군장군기록
234년촉한상서령 → 행도호·가절·익주자사기록
235~237년촉한대장군·녹상서사·안양정후기록
238~242년촉한대사마(대장군 개부) — 한중 주둔기록
243~245년촉한대사마 — 부로 돌아가 주둔기록
246년촉한대사마기록

나온 사건·전투

214년 · 광도장 → 면직 · 면직

선주가 유람 중 갑자기 광도에 이르러 장완이 공무를 처리하지 않고 술에 취한 것을 보고 노해 베려 하나, 제갈량이 '사직의 그릇이고 백리의 재목이 아니다, 정치를 안민 위주로 한다'고 청해 면관에 그친다.

정사 장완전: 장완이 주서좌로 선주를 따라 입촉해 광도장이 되었다. 선주가 유람하다 불쑥 광도에 이르러 많은 일이 처리되지 않았고 장완이 술에 취한 것을 보고 크게 노해 죄를 주려 했다. 군사장군 제갈량이 '장완은 사직의 그릇이지 백리의 재목이 아니다. 정치는 안민을 근본으로 하고 꾸밈을 먼저 하지 않으니 주공께서 다시 살펴 주십시오'라 청했다. 선주는 제갈량을 깊이 공경해 죄는 묻지 않고 급히 면관만 했다. 연도는 본문에 없다.

연의: 연의 65회

출전: 三國志 卷44 본 「蔣琬社稷之器非百里之才也其為政以安民為本不以修飾為先願主公重加察之」

234년 · 상서령 → 행도호·가절·익주자사 · 승진

제갈량이 죽자 상서령이 되고 곧 행도호·가절·익주자사를 겸해 대장군·녹상서사로 오른다. 새로 원수를 잃어 위태로운 때 슬픈 기색도 기쁜 기색도 없이 평소처럼 처신해 중망이 따랐다.

정사 장완전: 제갈량이 죽자 장완을 상서령으로 삼았고 이내 행도호·가절·영 익주자사를 더하고 대장군으로 옮겨 녹상서사가 되었으며 안양정후에 봉했다. 새로 원수를 잃어 원근이 위태로워할 때 장완은 출류발췌하여 군료의 오른쪽에 있으면서도 슬퍼하는 낯도 기뻐하는 낯도 없이 정신과 거동이 평소 같아 점차 중망이 복종했다.

연의: 연의 100회

출전: 三國志 卷44 본 「亮卒以琬為尚書令俄而加行都護假節領益州刺史遷大將軍錄尚書事封安陽亭侯」

243년 · 대사마 — 부로 돌아가 주둔 · 전략

제갈량처럼 진령 방면을 노리기 어렵다고 보아 한수·면수를 따라 위흥·상용을 칠 계획으로 배를 많이 만들었으나 병이 재발했고 중론도 반대하여 비의·강유가 설득하고 장완이 상소해 부로 돌아가 주둔한다. 연도는 본문에 없어 연희 6년(243)으로 둠.

정사 장완전: 장완은 제갈량이 여러 번 진천을 엿보았으나 길이 험하고 운반이 어려워 끝내 이기지 못한 것을 생각해, 배를 많이 만들어 한수·면수를 따라 위흥·상용을 습격하려 했다. 마침 지병이 도져 시행하지 못했고 중론도 이기지 못하면 돌아오는 길이 몹시 어렵다 하여 비의·강유 등을 보내 뜻을 알렸다. 장완이 상소해 '위는 구주에 걸쳐 뿌리를 뻗어 평정이 쉽지 않으니 동서가 힘을 합쳐야 하며, 양주 호인의 요충을 얻으려 강유를 양주자사로 삼으라'고 하고 마침내 돌아가 부에 주둔했다.

연의: 연의 해당 없음

출전: 三國志 卷44 본 「琬以為昔諸葛亮數窺秦川道險運艱競不能克不若乘水東下乃多作舟船欲由漢沔襲魏興上庸」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80제갈량 사후 대장군·녹상서사로 촉의 국정을 맡았다. 한중 주둔 뒤 부(涪)에 주둔하며 동정을 대비했다(장완전).
무력평가 불가무용 기록 없음.
지력76수로로 동진해 위흥·상용을 칠 계획을 세웠으나 구병과 중론으로 접었다(장완전).
정치90유부에서 군량과 병력을 조달해 제갈량의 출군을 뒷받침했다. 제갈량이 '공염의 뜻이 충직하고 우아하다'고 평했다(장완전).
매력82원망·모욕에도 기색이 없이 '사람마다 마음이 다르다'며 감정을 가라앉혔다(장완전). 제갈량이 후사를 맡기라 은밀히 표했다.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장완의 이동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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