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출생 연도 기록 없음
사망 -188년 — 혜제 7년(-188) 가을 8월 무인 — 죽음. 전문 「七年秋八月戊寅孝惠帝崩」(여태후본기)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05년 | 역양 | 태자(-205 책봉) | 기록 |
| -195년 | 장안 | 황제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9~-206년 | 한 | (고조의 아들) | 불명 |
| -205년 | 한 | 태자(-205 책봉) | 기록 |
| -204~-203년 | 한 | 태자(-205 책봉) | 불명 |
| -202~-197년 | 한 | 태자 | 불명 |
| -196년 | 한 | 태자 | 기록 |
| -195년 | 한 | 황제 | 기록 |
팽성 패전 때 수레에서 하후영에게 구해지고, 한왕이 돌아와 6월 태자로 세우며 역양을 지키게 한다.
정사 고조본기: 한왕이 팽성에서 패해 서쪽으로 달아나며 가족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고, 패한 뒤 홀로 효혜를 얻었다. 6월 태자로 세우고 역양을 지키게 했다. 하후영은 한왕이 급해 두 아이를 버리려 했는데도 끝내 거두어 태웠다.
출전: 史記 卷008 「敗後乃獨得孝惠六月立為太子」 / 史記 卷008 「令太子守櫟陽」 / 史記 卷095 「見孝惠魯元載之」
고조가 경포 토벌에 태자를 보내려 하자 상산사호가 이를 말려, 태자 폐립 논의가 이어진다.
정사 유후세가: 한 11년 경포가 반하자 병든 고조는 태자를 장수로 삼아 치게 하려 했다. 네 노인이 "태자가 군을 이끌어 공이 있어도 지위가 더 오르지 않고 공이 없으면 화를 입는다"며 건성후에게 말해 막으려 했다.
출전: 史記 卷055 「漢十一年黥布反上病欲使太子將往擊之」
고조가 태자를 폐하고 여의를 세우려 했으나 대신들과 유후의 계책으로 그치고, 4월 고조가 죽자 즉위한다.
정사 여태후본기: 고조가 효혜의 인약함을 두고 나를 닮지 않았다며 늘 태자를 폐하고 여의를 세우려 했으나 대신의 간쟁과 유후의 계책으로 태자는 폐해지지 않았다. 4월 갑진 고조가 장락궁에서 죽자 태자가 호를 이어 황제가 되었고, 사기 고조본기는 "기사에 태자를 세우고 태상황묘에 이르렀다"고 적는다.
출전: 史記 卷009 「賴大臣爭之及留侯策太子得毋廢」 / 史記 卷008 「四月甲辰高祖崩長樂宮」 / 史記 卷008 「太子襲號為皇帝孝惠帝也」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평가 불가 | 군 지휘 기록은 없다. |
| 무력 | 평가 불가 | 무력 기록은 없다. |
| 지력 | 50 | 조왕 여의를 직접 맞아 곁에서 지키려 했다(여태후본기). |
| 정치 | 50 | 즉위 뒤 정사를 보지 않고 술에 빠졌다고 한다(여태후본기, 범위 밖). |
| 매력 | 60 | 인자하고 약하다는 평이 고조의 폐립 논의의 배경이 되었다(여태후본기).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혜제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