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劉敬) — 사기·한서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한출생 생년 불명사망 몰년 불명기록 연도 3해

생몰

출생 생년 불명 — 기록 없음. 제 사람이고 본래 성은 루(婁), 고제가 유씨를 내렸다고만 나온다.

사망 몰년 불명 — 기록 없음 — 화친·이주책 이후의 행적이 본 권에 없다.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02년낙양낭중·봉춘군기록
-200년평성봉춘군 → 건신후(관내후)기록
-198년장안봉춘군 → 건신후(관내후)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09~-203년기타(기록 없음 — 제 사람)불명
-202년한낭중·봉춘군기록
-201년한낭중·봉춘군불명
-200년한봉춘군 → 건신후(관내후)기록
-199년한봉춘군 → 건신후(관내후)불명
-198년한봉춘군 → 건신후(관내후)기록
-197~-195년한봉춘군 → 건신후(관내후)불명

나온 사건·전투

-202년 · 낭중·봉춘군

농서로 수자리 가던 길에 낙양에서 고제를 찾아가 낙양이 아닌 관중에 도읍해야 한다고 진언한다. 장량의 지지로 고제가 관중에 도읍하자 성 유씨를 받고 낭중·봉춘군이 된다.

정사 유경열전: 제 사람 유경(루경)은 한 5년 농서로 수자리 가다 낙양을 지나면서 입은 양털옷 그대로 고제를 만나, 주나라와 달리 한은 큰 싸움을 치르고 천하를 얻었으니 진 땅의 험한 지세에 도읍해 산동을 목덜미에서 누르라고 했다. 고제가 신하들 의견이 갈려 망설이다 유후(장량)가 입관의 이로움을 밝히자 그날 서쪽 관중에 도읍했고, 루경에게 유씨를 내려 낭중, 봉춘군으로 삼았다.

출전: 史記 卷099 「漢五年戍隴西過洛陽高帝在焉」 / 史記 卷099 「陛下入關而都之山東雖亂秦之故地可全而有也」 / 史記 卷099 「及留侯明言入關便即日車駕西都關中」 / 史記 卷099 「賜姓劉氏拜為郎中號為奉春君」 / 資治通鑑 卷011 「拜婁敬為郎中號曰奉春君賜姓劉氏」

-200년 · 봉춘군 → 건신후(관내후)

한신(韓王信)과 흉노가 연합한다는 소식에 고제가 흉노 정탐을 보내자 다른 사자들은 공격 가능하다 했으나, 유경은 약한 모습만 보인 것이 매복이라며 반대한다. 고제가 그를 광무에 가두고 진군했다가 평성에서 흉노에 포위된다.

정사 유경열전: 한 7년 한왕 신이 반란을 일으켜 고제가 쳤고, 흉노를 정탐하러 갔던 사자 열 명은 모두 공격하자고 했으나 유경은 늙고 약한 것만 보이니 매복이 있을 것이라 했다. 고제가 「제나라 포로가 입으로 벼슬을 얻고 군을 막는다」며 꾸짖고 광무에 가뒀다. 이후 평성에서 흉노가 기병을 숨겨 고제를 백등에서 7일 포위했다. 고제가 광무에서 유경을 풀어 주고 건신후로 봉했다.

관련: 평성 백등산 포위

출전: 史記 卷099 「漢七年韓王信反高帝自往擊之」 / 史記 卷099 「臣往徒見羸瘠老弱此必欲見短伏奇兵以爭利」 / 史記 卷099 「械系敬廣武」 / 史記 卷099 「匈奴果出奇兵圍高帝白登七日然後得解」 / 史記 卷099 「乃封敬二千戶為關內侯號為建信侯」

-198년 · 봉춘군 → 건신후(관내후)

흉노와 장공주를 시집보내는 화친책을 올려 고제가 받아들이나, 여후가 반대해 종실 딸을 장공주라 하고 보내며 유경이 화친 약속을 맺으러 간다.

정사 유경열전: 유경이 적장 공주를 선우에게 시집보내 외손이 선우가 되도록 하자는 화친책을 올리자 고제가 좋다 하여 장공주를 보내려 했으나 여후가 밤낮 울어 말려 결국 가인의 딸을 장공주라 칭해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유경을 보내 화친 약속을 맺게 했다. 자치통감은 이를 고제 9년(기원전 198) 겨울로 적는다.

출전: 史記 卷099 「陛下誠能以適長公主妻之厚奉遺之」 / 史記 卷099 「上竟不能遣長公主而取家人子名為長公主妻單于」 / 史記 卷099 「使劉敬往結和親約」 / 資治通鑑 卷012 「使劉敬往結和親約」

-198년 · 봉춘군 → 건신후(관내후)

흉노가 장안과 가깝다는 점을 들어 제의 전씨, 초의 소·굴·경씨 등 호족 십여만 명을 관중으로 옮기자고 건의한다.

정사 유경열전: 유경이 흉노가 장안에서 7백 리밖에 안 되고 관중은 사람이 적으니 제의 전씨, 초의 소·굴·경과 연·조·한·위의 후예 및 호걸을 관중으로 옮기자고 했고 고제가 받아들여 십여만 명을 옮겼다. 자치통감은 고제 9년 11월로 적는다.

출전: 史記 卷099 「臣願陛下徙齊諸田楚昭屈景燕趙韓魏後」 / 史記 卷099 「乃使劉敬徙所言關中十餘萬口」 / 資治通鑑 卷012 「凡十餘萬口」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평가 불가지휘 기록이 없다.
무력평가 불가양털옷으로 수자리 가던 신분의 서술이며 무공 기록 없음.
지력90관중 도읍, 흉노의 매복 간파, 화친책, 호족 관중 이주책 등 큰 건의가 연이어 채택됐다(유경열전).
정치61관직은 낭중·봉춘군·건신후이며 실무 서술은 적고 건의 위주다.
매력52고제가 화를 내 가두었다가 사과하며 봉했다(유경열전). 수치는 만들어 넣은 값.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유경의 이동 경로

한 소속 다른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