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군(蒲將軍) — 사기·한서 기준 생애·이동 경로·능력치 근거

초출생 생년 불명사망 몰년 불명기록 연도 3해

생몰

출생 생년 불명 — 기록 없음. 이름·출신 모두 사서에 없고 「蒲將軍」으로만 불린다.

사망 몰년 불명 — 기록 없음 — 신안 일(기원전 206) 이후 사서에 나오지 않는다.

연도별 위치

연도지명직책근거
-208년하비장군(항량 휘하)기록
-207년거록장군(송의→항우 휘하)기록
-206년신안장군(송의→항우 휘하)기록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연도별 직책·소속

연도소속직책근거
-209년기타(기록 없음)불명
-208년초장군(항량 휘하)기록
-207~-206년초장군(송의→항우 휘하)기록

나온 사건·전투

-208년 · 장군(항량 휘하)

항량이 회수를 건너 서쪽으로 오자 영포와 함께 군을 이끌고 귀속해 모두 6~7만 명이 하비에 주둔한다.

정사 항우본기: 항량이 회수를 건너자 영포와 포장군도 군사를 이끌고 소속되어 모두 6~7만 명이 되어 하비에 주둔했다.

출전: 史記 卷007 「項梁渡淮黥布蒲將軍亦以兵屬焉凡六七萬人軍下邳」 / 資治通鑑 卷008 「布與蒲將軍皆以其兵屬焉」

-207년 · 장군(송의→항우 휘하)

송의 아래에서 장군으로 북쪽 조 구원에 나선다. 항우가 송의를 죽이자 당양군(영포)과 함께 항우에 속하고, 2만 명을 거느리고 먼저 하수를 건너 거록을 구하러 가 조금 이긴다.

정사 항우본기: 항우가 상장군이 되자 당양군과 포장군이 모두 항우에 속했다. 항우가 당양군과 포장군에게 병졸 2만을 주어 하수를 건너 거록을 구하게 했고 싸움은 조금 이로웠다. 진여가 다시 군사를 청하자 항우가 전군을 이끌고 하수를 건너 대승했다.

관련: 거록 전투

출전: 史記 卷007 「懷王因使項羽為上將軍當陽君蒲將軍皆屬項羽」 / 史記 卷007 「乃遣當陽君蒲將軍將卒二萬渡河救鉅鹿戰少利」

-207년 · 장군(송의→항우 휘하)

장함이 화친을 바라며 사람을 보내자, 항우가 포장군을 밤낮으로 보내 삼호를 건너 장남에 진 치고 진군을 두 번 깨뜨린다.

정사 항우본기: 장함이 시성을 보내 약조를 맺으려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항우가 포장군을 낮밤으로 군을 이끌고 삼호를 건너게 해 장남에 주둔하고 진군과 싸워 두 번 깨뜨렸다. 이어 항우가 전군으로 오수 위에서 진군을 크게 깼고, 곧 장함이 항복했다.

출전: 史記 卷007 「項羽使蒲將軍日夜引兵度三戶軍漳南與秦戰再破之」

-206년 · 장군(송의→항우 휘하)

진 항졸이 불복할 것을 걱정한 항우가 영포·포장군과 상의해 신안성 남쪽에서 진 졸 20여만 명을 밤에 쳐 묻는 일에 참여한다. 이어 함곡관을 지키는 군을 치는 데 당양군이 앞장선다.

정사 항우본기: 항우가 영포와 포장군을 불러 진의 졸이 많고 마음이 따르지 않으니 쳐 죽이고 장함·사마흔·동예만 데리고 진에 들어가자고 의논했고, 초군이 밤에 진 졸 20여만 명을 신안성 남쪽에 묻었다. 함곡관에서는 당양군 등을 시켜 관을 치게 했다. 포장군의 참여 범위는 계책 의논에 한정해 읽고, 직접 실행했는지는 본문에 없다.

관련: 함곡관 입관

출전: 史記 卷007 「項羽乃召黥布蒲將軍計曰」 / 史記 卷007 「於是楚軍夜擊阬秦卒二十餘萬人新安城南」

능력치와 근거

항목전성기 수치근거
통솔512만 병을 이끌고 하수를 건넜다(항우본기).
무력62장남에 진 쳐 진군을 두 번 깼다(항우본기).
지력50별도 책략 서술은 없다.
정치평가 불가정치 기록 없음.
매력50기록상 영포(당양군)와 늘 나란히 거론된다. 수치는 만들어 넣은 값.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장군의 이동 경로

초 소속 다른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