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출생 기록 없음(초 사람, 항량에게 간언한 인물)
사망 -207년 — 2세 3년(-207) 11월 — 안양 진중에서 항우가 목을 벰(項羽本紀: 「即其帳中斬宋義頭」; 달은 漢書 高帝紀의 「十一月」)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08년 | 정도 | 초 영(令)·상장군(경자관군) | 기록 |
| -207년 | 안양 | 초 영(令)·상장군(경자관군)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9년 | 기타 | (기록 없음) | 불명 |
| -208~-207년 | 초 | 초 영(令)·상장군(경자관군) | 기록 |
정도에서 항량의 교만을 간했으나 듣지 않았고, 제로 가는 길에 고릉군 현을 만난다.
정사 항우본기: 항량이 진군을 두 번 깨고 교만한 빛을 보이자 송의가 「戰勝而將驕卒惰者敗」라 간했으나 항량은 듣지 않았다. 항량이 송의를 제에 사신으로 보내자 길에서 제 사신 고릉군 현을 만났고, 현이 항량 군이 반드시 질 것이라 말했다.
관련: 정도 전투
출전: 史記 卷007 「戰勝而將驕卒惰者敗」 / 史記 卷007 「乃使宋義使於齊」
항량의 패배를 맞힌 일로 회왕에게 불려가 상장군이 되어 조를 구하러 간다.
정사 항우본기: 고릉군 현이 회왕에게 송의가 항량의 패배를 미리 말했다고 아뢰었다. 왕이 송의를 불러 크게 기뻐해 상장군으로 삼고 항우를 노공 차장, 범증을 말장으로 두어 조를 구하게 했다. 별장들은 모두 송의에 속해 경자관군이라 불렸다.
관련: 정도 전투
출전: 史記 卷007 「因置以為上將軍項羽為魯公為次將范增為末將救趙」 / 史記 卷007 「號為卿子冠軍」
안양에서 46일 머물며 나아가지 않다 아들 송양을 제에 보내며 잔치를 하다 항우에게 목이 베인다.
정사 항우본기: 안양에 이르러 46일 동안 나아가지 않았다. 송의는 「먼저 진과 조가 싸우게 한다」며 아들 송양을 제의 재상으로 보내고 무염까지 배웅해 큰 잔치를 열었다. 추위와 비에 군사가 굶주리자 항우가 아침 문안 때 장막 안에서 송의의 목을 베고 「송의는 제와 모반했다」며 군령을 냈다.
출전: 史記 卷007 「行至安陽留四十六日不進」 / 史記 卷007 「項羽晨朝上將軍宋義即其帳中斬宋義頭」
정사 항우본기: 장함이 정도에서 항량을 깬 뒤 황하를 건너 조를 치자 조왕 헐·진여·장이는 거록성으로 들어갔다. 장함은 왕리·섭간에게 거록을 에워싸게 하고 자신은 그 남쪽에서 용도로 곡식을 대었다. 초 회왕이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조를 구하게 했으나 안양에서 46일을 머물렀고, 항우가 송의의 목을 베고 상장군이 되었다. 항우는 당양군·포 장군에게 병력 2만을 주어 먼저 강을 건너게 했으나 전세가 약해 진여가 병력을 청하자 전군을 이끌어 강을 건너 배를 가라앉히고 솥을 깨며 3일 양식만 지니는 결사의 태세로 왕리를 에워싸 아홉 번 싸워 용도를 끊고 크게 깨 소각을 베고 왕리를 사로잡았다. 섭간은 항복하지 않고 불에 타 죽었다. 구원하러 온 제후군 10여 보루는 벽 위에서 구경만 했다. 이후 장함은 극원에서 항우와 대치하다 항복했다.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3 | 상장군으로 조를 구하러 갔으나 안양에서 46일 머물러 나아가지 않다가 항우에게 목이 베인다(항우본기). |
| 무력 | 평가 불가 | 직접 싸운 기록이 없다. |
| 지력 | 73 | 항량 군이 질 것을 미리 말해 맞혔고 「承其敝」 전략을 내세웠으나 항우는 조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반박했다(항우본기). |
| 정치 | 55 | 군 안에서 아들 송양을 제 재상으로 보내며 큰 잔치를 열었다는 비판이 있고 정치 기록은 없다(항우본기). |
| 매력 | 50 | 「猛如虎很如羊貪如狼」라 한 군령과 잔치에서 병사들의 굶주림을 외면해 항우에게 「非社稷之臣」이라 비판받았다(항우본기).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송의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