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출생 기록 없음(패 사람)
사망 몰년 불명 — 사망 연도 이 범위 밖(문제 때 회남여왕에게 살해됨 — 이 서술은 본문에서 대조하지 못했다)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05년 | 패현 | 태공·여후를 모시던 사인 | 기록 |
| -195년 | 장락궁 | 벽양후(사인)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9~-207년 | 한 | (패의 사인 — 직위 불명) | 불명 |
| -206년 | 한 | 태공·여후를 모시던 사인 | 불명 |
| -205년 | 한 | 태공·여후를 모시던 사인 | 기록 |
| -204~-203년 | 한 | (초에 인질로 잡힘) | 불명 |
| -202~-196년 | 한 | 벽양후(사인) | 불명 |
| -195년 | 한 | 벽양후(사인) | 기록 |
팽성 패전 뒤 태공·여후를 모시고 샛길로 한왕을 찾다가 초군을 만나 함께 붙잡힌다.
정사 항우본기: 심이기가 태공·여후를 따라 샛길로 가 한왕을 찾았으나 도리어 초군을 만났다. 항우는 이들을 군중에 두어 인질로 삼았다.
관련: 팽성 전투
출전: 史記 卷007 「審食其從太公呂后閒行求漢王反遇楚軍」
고조가 영포 정벌 중 병을 얻자 노관을 맞이해 문초하도록 보내지고, 고조 사후 여후와 발상을 감추는 모의를 한다.
정사 고조본기: 노관이 반란에 연루되자 벽양후가 가서 맞이했으나 노관은 병을 핑계했다. 고조가 죽자 여후는 심이기와 장수들을 모두 멸할 것을 의논했으나 역 장군이 만류하자 심이기가 이를 전해 정미일에 발상했다.
출전: 史記 卷008 「使辟陽侯迎綰綰稱病」 / 史記 卷008 「乃以丁未發喪大赦天下」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28 | 전투 지휘 기록이 없다. 팽성 패전 때 태공·여후를 모시고 초군에게 붙잡혔다(항우본기). |
| 무력 | 평가 불가 | 무력 기록 없음. |
| 지력 | 57 | 여후와 모의한 발상 은폐는 역상의 만류로 풀렸다(고조본기). |
| 정치 | 55 | 벽양후로 좌승상이 되었으나 안에서 일을 보는 정도였다(진승상세가·여태후본기). |
| 매력 | 50 | 여후의 측근으로 알려졌다(여태후본기). 인품 서술은 없다.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심이기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