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출생 기록 없음(설 사람)
사망 몰년 불명 — 사망 연도 기록 없음 — 혜제 때까지 태상으로 활동(叔孫通傳)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09년 | 함양 | 대조 박사(진) | 기록 |
| -208년 | 설 | 항량·회왕·항우에 차례로 의탁 | 기록 |
| -205년 | 팽성 | 한왕에 항복(박사 직위 직전) | 기록 |
| -202년 | 정도 | 박사→태상 | 기록 |
| -200년 | 장락궁 | 박사→태상 | 기록 |
| -198년 | 장안 | 태자태부 | 기록 |
| -195년 | 장안 | 태자태부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9년 | 진 | 대조 박사(진) | 기록 |
| -208년 | 초 | 항량·회왕·항우에 차례로 의탁 | 기록 |
| -207~-206년 | 초 | 항량·회왕·항우에 차례로 의탁 | 불명 |
| -205년 | 한 | 한왕에 항복(박사 직위 직전) | 기록 |
| -204~-203년 | 한 | 한왕에 항복(박사 직위 직전) | 불명 |
| -202년 | 한 | 박사→태상 | 기록 |
| -201년 | 한 | 박사→태상 | 불명 |
| -200년 | 한 | 박사→태상 | 기록 |
| -199년 | 한 | 박사→태상 | 불명 |
| -198년 | 한 | 태자태부 | 기록 |
| -197~-196년 | 한 | 태자태부 | 불명 |
| -195년 | 한 | 태자태부 | 기록 |
진승 봉기 소식에 2세가 박사들에게 묻자 「도둑일 뿐」이라 답해 박사 직을 받고 달아난다.
정사 숙손통전: 진승이 일어나자 2세가 박사 유생 30여 명에게 의견을 물었다. 모두 반란이라 했으나 숙손통은 「군도서절구도」라 말해 2세를 기쁘게 했고 비단·옷과 박사 직을 받았다. 궁을 나와 「호랑이 입에서 간신히 벗어났다」고 하며 설로 달아났다.
출전: 史記 卷099 「此特群盜鼠竊狗盜耳」 / 史記 卷099 「我幾不脫於虎口」
설로 가 항량을 따르고, 정도에서 패한 뒤 회왕을 따른다.
정사 숙손통전: 설이 이미 초에 항복해 있었고 항량이 설로 오자 숙손통이 따랐다. 정도에서 패한 뒤 회왕을 따랐고, 의제가 장사로 옮겨진 뒤에는 항왕을 섬겼다.
출전: 史記 卷099 「及項梁之薛叔孫通從之」 / 史記 卷099 「敗於定陶從懷王」
한왕이 팽성에 들어오자 항복하고 초 옷으로 갈아입어 한왕의 환심을 산다.
정사 숙손통전: 한 2년 한왕이 다섯 제후를 거느리고 팽성에 들어오자 숙손통이 한왕에게 항복했다. 한왕이 패해 서쪽으로 가자 끝까지 따랐다. 유복을 싫어하는 한왕을 위해 짧은 초 옷으로 바꿔 입었다.
관련: 팽성 전투
출전: 史記 卷099 「漢二年漢王從五諸侯入彭城叔孫通降漢王」 / 史記 卷099 「乃變其服服短衣楚製漢王喜」
한왕이 황제에 오르자 의례와 칭호를 정하고, 진의 번거로운 의례를 없앤다.
정사 숙손통전: 한 5년 제후가 한왕을 황제로 받들 때 숙손통이 그 의례와 칭호를 정했다. 고제는 진의 가혹한 의법을 모두 없애고 간단하게 했으나, 군신이 술자리에서 공을 다투며 칼로 기둥을 치는 일이 잦았다.
출전: 史記 卷099 「叔孫通就其儀號」 / 史記 卷099 「拔劍擊柱高帝患之」
노의 유생 30여 명과 제자로 조의를 만들어 장락궁 조회에서 시행해 태상이 된다.
정사 숙손통전: 한 7년 장락궁이 완성되자 10월 제후·군신이 조회했다. 숙손통이 노의 유생 30여 명과 함께 만든 의례에 따라 질서 있게 진행되었고, 고제가 「이제야 황제의 귀함을 알았다」고 하며 숙손통을 태상에 임명하고 금 500근을 내렸다.
출전: 史記 卷099 「吾乃今日知為皇帝之貴也」 / 史記 卷099 「乃拜叔孫通為太常賜金五百斤」
태자태부로 옮긴다.
정사 숙손통전: 한 9년 고제가 숙손통을 태자태부로 옮겼다.
출전: 史記 卷099 「漢九年高帝徙叔孫通為太子太傅」
고조가 조왕 여의로 태자를 바꾸려 하자 죽음을 걸고 간한다.
정사 숙손통전: 한 12년 고조가 조왕 여의로 태자를 바꾸려 하자 숙손통이 진시황이 부소를 정하지 않아 조고가 호해를 세운 일을 들어 「臣願先伏誅」라 간했다. 고조가 「나는 농담했을 뿐」이라 했으나 뒤에 유후가 부른 객이 태자를 따라 오자 바꿀 뜻을 접었다.
출전: 史記 卷099 「臣願先伏誅以頸血汙地」 / 史記 卷099 「上乃遂無易太子志矣」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50 | 전쟁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박사·태상으로 예의를 정했다(숙손통전). |
| 무력 | 50 | 무력 기록 없음. 제자 100여 명을 이끌고 한에 항복했다(숙손통전). |
| 지력 | 81 | 2세 앞에서 「群盜鼠竊狗盜」라 둘러 말해 위기를 넘기고, 한왕에게는 짧은 초 옷으로 바꿔 입어 마음을 샀다(숙손통전). |
| 정치 | 96 | 한 7년 장락궁 조회 의례를 만들어 군신의 질서를 세웠고 태상이 되었다. 태자 폐위에는 죽음을 걸고 간했다(숙손통전). |
| 매력 | 82 | 「諸生」을 낭으로 천거시키고 상금을 나눠 주어 제자들에게 성인이라 불렸다(숙손통전). 노의 두 유생은 그를 면전의 아첨꾼이라 불렀다.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숙손통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