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생년 불명 — 출생 연도 기록 없음.
사망 몰년 불명 — 몰년 기록 없음. 한 5년(기원전 202) 이후 호군중위 이후의 행적이 적혀 있지 않다.
| 연도 | 지명 | 직책 | 근거 |
|---|---|---|---|
| -204년 | 육 | 알자(謁者) | 기록 |
근거 칸의 「추정」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
| 연도 | 소속 | 직책 | 근거 |
|---|---|---|---|
| -209~-205년 | 기타 | (역할 기록 없음) | 불명 |
| -204년 | 한 | 알자(謁者) | 기록 |
| -203년 | 기타 | (역할 기록 없음) | 불명 |
| -202년 | 한 | 호군중위 | 기록 |
| -201~-195년 | 한 | 호군중위 | 불명 |
팽성 패전 뒤 한왕의 명으로 20명과 회남에 들어가 태재를 통해 경포를 만나, 초를 믿을 수 없다는 점을 설득해 한으로 돌아서게 하고, 초 사자를 죽이도록 부추긴다.
정사 경포열전: 한왕이 "누가 나를 위해 회남에 사신으로 가 초를 배반하게 하겠는가" 하자 알자 수하가 20명과 회남에 갔다. 태재를 통해 사흘 만에 경포를 만나 한이 이길 형세를 설득했고, 경포가 몰래 따르기로 하자 수하가 초 사자 앞에 들어가 "구강왕은 이미 한에 귀의했다"고 외쳐 경포가 사자를 죽이고 초를 공격하게 했다.
출전: 史記 卷091 「孰能為我使淮南令之發兵倍楚留項王於齊數月我之取天下可以百全隨何曰臣請使之乃與二十人俱使淮南」 / 史記 卷091 「隨何直入坐楚使者上坐曰九江王已歸漢楚何以得發兵」 / 史記 卷091 「於是殺使者因起兵而攻楚」
항우가 죽은 뒤 고조가 수하를 부유라며 깎아내리자 "5만 보병과 5천 기병으로 회남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반박해 호군중위가 된다.
정사 경포열전: 고조가 수하를 부유라 하자 수하가 "폐하가 보병 5만, 기병 5천으로 회남을 얻을 수 있겠느냐"며 공이 보병 5만·기병 5천보다 크다고 했고, 고조가 수하를 호군중위로 삼았다.
출전: 史記 卷091 「是何之功賢於步卒五萬人騎五千也」 / 史記 卷091 「乃以隨何為護軍中尉」
정사 경포열전·고조본기: 한 11년 팽월이 주살되자 회남왕 경포는 두려워 몰래 병력을 모았고, 중대부 분혁의 고변을 계기로 7월 반란을 일으켰다. 설공이 고조에게 경포의 상·중·하계를 말하며 하계(오와 하채를 취하고 월·장사로 물러남)를 쓸 것이라 했고, 경포는 형왕 유가를 부릉으로 쫓아 죽이고 병력을 빼앗아 회수를 건너 초를 쳤다. 초가 서·동 사이에서 3군으로 나뉘어 싸우다 한 군이 깨지자 둘이 흩어졌다. 경포는 서쪽으로 가서 12년 겨울 10월 기현 서쪽 회추에서 고조의 친정군과 마주쳤고, 고조는 용성에 보루를 쌓고 항적의 진 같은 경포의 진을 보며 싫어했다. 고조가 "왜 반란하는가" 묻자 경포는 "황제가 되고 싶을 뿐"이라 답했고 큰 싸움 끝에 경포가 패해 회수를 건너 백여 명과 강남으로 달아났다. 장사 애왕의 사자에게 속아 번양으로 갔다가 번양 사람에게 살해되었다. 병력 수는 원문에 없어 null로 둔다.
| 항목 | 전성기 수치 | 근거 |
|---|---|---|
| 통솔 | 평가 불가 | 군 지휘 기록이 없다(경포열전). |
| 무력 | 평가 불가 | 싸운 기록이 없고 20명과 적국에 들어갔다(경포열전). |
| 지력 | 86 | 회남왕 경포를 말로 설득해 초를 배반하게 했다(경포열전). |
| 정치 | 평가 불가 | 호군중위가 되었으나 이후 정치 기록은 없다(경포열전). |
| 매력 | 72 | 고조가 "부유(腐儒)"라 했으나 수하의 반박에 "자네의 공을 따지겠다"며 인정했다(경포열전). |
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평가 불가」로 둡니다.
지도에서 보기 — 수하의 이동 경로